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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필로소피74

퇴직 후 "지금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 앞에서 —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정약용에게 묻다 명함을 처음 없애본 게 언제였습니까. 저는퇴직 다음 날 잘 사용하지 않았던 명함이었지만 서랍 한쪽에 있었던 명함 뭉치를 버리려다가, 그냥 서랍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버리지도 못하고. 그 작은 종이 몇 장이 없어진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묵직했습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다가 그 서랍속 명함 생각이 났습니다. 직함이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직함 없이도 충분한 것인지. 그 질문을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아주 또렷하게 던집니다.커피를 타는 손이 장부를 꿰뚫는다2020년 개봉한 이종필 감독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만, 이 영화의 핵심은 결말의 반전이 아니라 세 여자의 일상에 있습니다.이자영, 유나, 보람. 셋 다 상고 .. 2026. 8. 20.
자연을 지키면서도 먹고살 수 있을까 《허니랜드》 × 한스 요나스 — 인간과 자연 사이의 책임 "반은 나를 위해, 반은 벌을 위해."이 짧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거창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 여자가 벌집 앞에서 중얼거리듯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장이 유독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제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을 아주 단순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배추 모종 하나가 품고 있던 질문실업급여 신청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여름, 저는 작은 텃밭에 배추 모종을 심었습니다. 친구 남편이 건네준 모종 몇 포기였습니다. 밭을 고르고 비닐을 씌우고 조심스럽게 심었는데, 며칠 만에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면서 잎이 힘없이 늘어졌습니다.물을 주며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TV를 켜니 아랫지방에 폭우가 계속된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습.. 2026. 8. 19.
저 집과 땅이 내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리틀 포레스트》 × 장자 — 남의 좋은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찾아서 혜원이 처음 고향 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짐 가방 하나를 끌고, 아무 말 없이 부엌으로 가서 밥을 짓는 그 장면. 저는 처음 그 장면을 보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시험에 떨어지고, 연애도 꼬이고, 서울이 버거워진 사람이 결국 돌아온 자리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영화가 귀농을 권유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 저만 그렇게 읽은 게 아닐 거라 믿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려 합니다.밭을 갈면서 혜원이 찾은 것《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 2018)에는 사건이 거의 없습니다. 혜원은 씨를 뿌리고, 풀을 뽑고, 음식을 만들고, 친구와 밥을 먹습니다. 봄이 오면 봄 음식을 만들고, 겨울이 오면.. 2026. 8. 18.
가족을 위해 살다 보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바튼 핑크》 × 실존주의 호텔 방 벽지가 천천히 부풀어 오릅니다. 뜨거운 습기에 풀이 녹아 벽에서 종이가 떨어지고, 바튼 핑크는 타자기 앞에 앉아 있습니다. 아무것도 써지지 않습니다. 그는 위대한 서민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옆방 서민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타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작가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역할에 지쳐버린 누군가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호텔방이라는 이름의 역할 감옥1991년 코엔 형제가 연출한 《바튼 핑크》는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극작가가 할리우드로 건너가 창작의 벽에 부딪히는 이야기입니다. 무대는 거의 한 곳, 얼스 호텔 621호실입니다.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불쾌할 만큼 답답하고, 이야기는 어.. 2026. 8. 17.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를 희생해야 할까《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에리히 프롬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이, 나를 지워가는 것과 같은 말일까요? 광복절 연휴에 남편과 시어머니 댁에 다녀오는 길에 저는 이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어두워질 때까지 밭에서 비료를 뿌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잡초를 뽑으러 나갔지만 하필 비가 내렸습니다. 결국 시어머니의 표정은 끝내 풀리지 않은 것 같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는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떠올렸습니다. 민규동 감독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었습니다.어머니의 손이 멈추는 장면에서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영화 속 어머니는 쉬지 않습니다. 밥을 하고, 빨래를 걷고, 남편의 잔소리를 흘려듣고, 자녀들의 일에 마음을 쓰면서 하루를 마칩니다. 카메라는 그 반복되는 손을 자주 보여줍니다. 아무 설명 없이,.. 2026. 8. 16.
결과를 알 수 없어도 행동할 이유가 있는가 《하얼빈》 × 알베르 카뮈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행동했다." 이 한 마디를 들었을 때, 저는 잠시 멍했습니다. 결과를 확신하지 못한 채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 남긴 말치고는 너무 담담했기 때문입니다. 《하얼빈》은 그 담담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2026년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영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다루고 있으므로,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결과를 모르면서도 움직이는 사람들광복절을 앞둔 지난주, 저는 지인과 함께 지역 영상센터에서 《영웅》을 다시 봤습니다. 이미 한 번 본 영화였는데도 이번엔 유독 조마리아 여사의 장면에서 손을 꼭 쥐었습니다. 아들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어머니는 수의를 준비합니다. 살려달라고 빌지 않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저.. 2026. 8. 15.
가족을 돌보는 삶과 나 자신으로 사는 삶은 반드시 반대일까《오케이 마담2》 × 시몬 드 보부아르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저를 기다리고 있던 건 화려한 엔딩 크레딧이 아니었습니다. 쌓인 설거지와 남편의 짐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안에서 뭔가 작게 꺼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관 안에서는 분명히 살아 있는 기분이었는데, 집 문을 여는 순간 그 감각이 흐릿해졌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피로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저는 그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내재성(immanence)과 초월(transcendence)이라는 개념이 그때 불쑥 떠올랐습니다.영화관 안의 나와 집 안의 나는 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까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장면은 조심스럽게 넘어가겠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장면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오케이 마담2》에는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 예상치 못.. 2026. 8. 14.
불합격했는데, 왜 마음 한쪽이 편해졌을까《인생은 아름다워》와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 수용소 안, 귀도는 아들의 눈을 피해 총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과장된 발걸음으로 걷습니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병사 흉내를 내듯이. 조슈아가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귀도는 끝까지 웃음을 연기합니다. 그 장면 앞에서 저는 한참 멈췄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해보려 합니다.그런데 저는 그날 유독 그 장면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미세먼지 감시원 채용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은 직후였거든요. 8개월 동안 일했던 자리였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탈락이었습니다.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자 실망 아래에서 뭔가 후련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그게 뭔지 몰라서 영화를 다시 켰고, 귀도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에피쿠로스(Epicurus)가 떠.. 2026. 8. 9.
인간은 자연의 주인인가, 일부인가《프린세스 모노노케》로 읽는 노자의 자연철학 숲의 신 모로가 산을 등에 태우고 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람을 가르는 흰 늑대의 발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 저는 리모컨을 내려놓았습니다. 1997년에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웅장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면서는 달랐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멈춰,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원래부터 인간 바깥에 있던 것인가." 마침 며칠 전 미세먼지 점검원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다시 쓰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지원동기 칸을 채우면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는 걸,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노자가 경고한 것과 에보시가 선택한 것타타라 마을의 대장장이 에보시는 나쁜 사.. 2026. 8. 8.
환경을 지키는 것은 인간만을 위한 일일까 《월-E》로 읽는 아르네 네스의 심층생태학 마트 장바구니에 담긴 일회용 용기를 꺼내다가 문득 멈췄습니다. 오늘만 몇 개째인지 세어보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월-E》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쓰레기 더미 위에 홀로 남겨진 작은 로봇이, 아무도 보지 않는 지구에서 묵묵히 쓰레기를 압축하는 장면. 그 모습이 왜인지 낯설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지만, 정작 '왜'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미래 세대를 위해서? 그 대답 너머에 아르네 네스(Arne Næss)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화분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고 가는 로봇의 손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영화 초반, 월-E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홀로 일합니다. 감독 앤드루 스탠턴은 대사 없이 오직 화.. 2026. 8. 7.
우리는 왜 진실을 보면서도 외면하는가 《돈 룩 업》 × 하이데거 두 과학자가 대통령 집무실에서 허둥지둥 설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혜성이 온다고, 몇 달 안에 지구와 충돌한다고, 확률이 아니라 확정이라고. 그런데 대통령은 선거 일정을 꺼내 듭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웃겨야 하는데 웃기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뉴스 속에서, 혹은 제 일상에서.이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우리는 왜 진실을 보면서도 외면하는가영화 《돈 룩 업》은 2021년 애덤 맥케이 감독이 연출했습니다. 혜성 충돌이라는 설정은 사실 기후위기의 메타포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기후위기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왜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걸까, 라는 질문입니다.솔직히 처음.. 2026. 8. 6.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투모로우》로 읽는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 "우리가 경고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았을 뿐이죠."영화 속 잭 홀 박사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저는 스크린을 보면서 묘한 감각이 들었습니다. 무서움도 분노도 아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습니다. 뉴스에서 본 적 있는 표정, 회의실에서 들어본 적 있는 침묵 같은 것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 2004)》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만든 재난 블록버스터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한스 요나스(Hans Jonas)의 책임의 원리와 함께 읽으면, 화면 속 폭풍보다 훨씬 무거운 무언가가 남습니다. 경고는 있었다, 듣는 귀가 없었을 뿐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장면은 해일도 빙하도 아닙니다. 잭 홀 박사가 정치인들 앞에서 기후 붕괴 시뮬레이션 결과를 발표.. 2026.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