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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필로소피74

전쟁은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한 아이의 꿈까지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길가메시의 꿈》 × 알베르 카뮈 "시지프는 행복했을 것이다." 카뮈가 이 한 문장을 썼을 때, 저는 처음엔 그게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평생 바위를 굴려 올리고 또 굴러 내려오는 걸 반복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니요. 그런데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폐막식이 끝나고 혼자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그 문장이 갑자기 다르게 읽혔습니다. 그날 본 영화 때문이었습니다.티그리스 강가에서 아이가 바라본 것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의 초반부, 아홉 살 소년 춤춤이 강가에 쪼그려 앉아 물 위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이의 눈은 강물이 아니라 강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습니다. 감독 모하메드 알 다라지는 그 시선을 카메라로 쫓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의 등을 오래, 천천히 담습니다.저는 그 등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가 .. 2026. 9. 9.
텃밭의 고구마와 아들의 직장 걱정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에픽테토스 "네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하는 한, 너는 노예다." 에픽테토스가 이 말을 했을 때, 그는 로마 제국에서 실제로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텃밭에서 남편 전화를 받던 날 이 문장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텃밭 고구마와 아들 직장 걱정 사이에서, 내가 진짜 살고 있는 삶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2020년 김초희 감독이 연출한 장편 데뷔작입니다. 강말금, 윤여정, 윤승아, 배유람이 주연을 맡았고, 감독 자신의 실직 경험이 깊이 녹아 있습니다.찬실이가 잃은 것, 그리고 남은 것영화 프로듀서 찬실은 어느 날 갑자기 일을 잃습니다. 함께 일하던 감독이 술자리에서 급사하고, 준비 중이던 영화는 엎어집니다. 그녀가 잃은 건 직업만.. 2026. 9. 8.
30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메밀꽃: 《메밀꽃 필 무렵》 × 칸트 × 《천국의 나날들》 넓은 밀밭이 바람에 쓸린다. 카메라는 아무도 쫓아가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다. 테런스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1978)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인물의 대사가 아니라 바로 그 장면입니다. 황금빛 들판이 저녁 빛에 잠기는 그 몇 초 동안, 저는 스크린 앞에서 이상한 질문 하나를 붙들고 있었습니다."아름다움이란 것은, 볼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일까?"그 질문이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봉평의 메밀꽃밭 앞에 섰을 때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달빛 아래 메밀꽃과 맬릭의 들판, 그 풍경이 묻는 것30여 년 전 처음 봉평을 찾았을 때는 솔직히 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이효석 문학관 입구를 서두르던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무엇을 먹일지, 다음 목적지까지 시간이 .. 2026. 9. 7.
다시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 《Stages》 × 찰스 테일러의 진정성 철학 아들과 나란히 공연장 바닥에 서 있던 그 밤이 자꾸 떠오릅니다. 처음엔 서기 싫다며 그냥 가겠다고 했던 아이가, 막상 가수의 표정을 가까이서 보더니 조금씩 몸이 풀렸습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 아이는 지금 음악이 그리운 건지, 아니면 그때의 자기 자신이 그리운 건지. 며칠 뒤 영화 《스테이지》를 혼자 보면서, 그 질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밴드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영화는 벤 가르자가 처음으로 혼자 무대에 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장면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밴드가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름 석 자보다 밴드 이름이 먼저였고, 혼자 틀린 음 하나가 공연 전체를 망치는 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울타리가 사라졌습니다.철.. 2026. 9. 6.
《묻어둔 여름》 × 미셸 푸코: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이라고 말하는가 평일 아침에 극장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날 저를 조금 낯선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나이대의 분들이 보였고, 다들 저처럼 조용히 앉아 스크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극장에 있으면 안 되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그 작은 의문이 영화가 끝난 뒤 훨씬 더 큰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누구의 허락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스캔들이 아니라 시선이 그들을 무너뜨렸다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영화를 먼저 보신 뒤 이 글로 돌아오셔도 좋습니다.1810년, 에든버러의 두 여성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갑니다. 그들이 누군가를 해친 것도, 법을 어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생 하나가 두 사.. 2026. 9. 5.
실업인정 교육을 놓친 날, 나는 새로운 삶의 리듬을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하루》 × 에픽테토스 실업인정 교육을 놓친 날 오후, 저는 차 안에서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고용센터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하루 전체를 흔들어놓았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하루를 잘못 살았다는 것이, 정말 내 삶 전체가 어긋나고 있다는 신호일까요? 홍상수의 《우리의 하루》는 바로 그 질문 앞에 조용히 서 있는 영화입니다.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홍상수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찍었을까《우리의 하루》는 2023년 칸 영화제 감독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된 홍상수의 서른 번째 장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사건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극적인 사건이 없습니다.인물들은 만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 2026. 9. 4.
풀들 사이에서도 부추는 향기를 냈습니다 《미나리》 × 빅터 프랭클 할머니 순자가 개울가에 미나리 씨앗을 뿌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닙니다. 거창한 선언도 없습니다. 그냥 쪼그려 앉아, 손에 쥔 씨앗을 흙과 물 사이에 놓아줍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저 씨앗은 지금 얼마나 많은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할까. 그리고 저는, 지금 어떤 땅에 씨앗을 심고 있을까.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장면의 의미를 천천히 생각해보려 합니다.살아남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 아칸소 주의 낯선 시골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한국계 이민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정이삭 감독이 2021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세상에 알려진 작품입니다.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 2026. 9. 3.
게임을 하는 아들과 영화를 보는 엄마, 그래도 우리는 함께 있었습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 × 마르틴 부버 가족이란 서로를 가장 잘 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어쩌면 우리는 가족을 오래 알았다는 이유로, 정작 지금 이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장 늦게 알아채는 건 아닐까요. 저는 아들과 PC방에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화면을 들여다보던 어느 저녁에, 그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붙잡았습니다.《미스 리틀 선샤인》(2006)은 조나단 데이톤과 발레리 페리스 감독이 만든 가족 로드무비입니다. 영화는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낡은 폭스바겐 승합차 한 대. 그 안에 탄 여섯 명은 각자의 실패와 고집과 침묵을 품고 달립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같은 마음으로 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끝까지 함께 달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이.. 2026. 9. 1.
동창은 NASA에 갔다 왔고, 나는 실업 상태였습니다 《어바웃 슈미트》 × 에픽테토스 퇴직 후 텅 빈 사무실 같은 집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 잭 니콜슨이 연기한 워렌 슈미트는 마지막 퇴근을 마치고 돌아온 첫날 밤,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30년 넘게 일한 보험회사는 아무 문제 없이 그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고, 후임자는 정중하게 그를 돌려보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그 표정을 지은 적이 있다고.오랜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동창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눈에 띄지 않던 친구인데, 지금은 서울의 유명 대학 교수가 되어 NASA까지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 마음은 축하보다 먼저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저는 그날 실업 상태였거든요.직업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걸까워렌 슈미트의 가장 큰 고통은 실직이 아닙니다. 그는 정년.. 2026. 8. 31.
엄마가 원하는 안정과 내가 원하는 삶은 다를 수 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 아들이 "계속 다니기 싫다"고 말했을 때, 저는 잠깐 말을 잃었습니다. 정규직에 월세 지원에 근속 인센티브까지. 제가 퇴직 후 기간제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얼마나 간절하게 원했던 조건들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직후,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가 "엄마가 너무 원하는 걸 다 들어줘서 그렇다"는 말까지 듣고 나니, 울고 싶어졌습니다. 내가 잘못 키운 걸까. 더 냉정했어야 했을까. 그 혼란 속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습니다. OTT 새 가입이 귀찮아서 영화 대신 책으로 손이 갔는데,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싫다는 말 뒤에 있는 것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아들의 "싫다"가 단순한 불평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도 처음에는.. 2026. 8. 24.
좋은 직장인데 왜 다니기 싫을까? 《소울》 × 빅터 프랭클 — 직업은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조 가드너가 처음으로 무대에 섭니다. 그토록 원하던 재즈 클럽, 그토록 원하던 스포트라이트. 손끝이 건반을 두드리는 순간, 저는 그 장면에서 잠깐 호흡을 멈췄습니다. 당연히 여기서 영화가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꿈을 이뤘으니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그런데 픽사는 그 순간 이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이후'가 저를 한참 붙잡아 두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함께 들여다보는 글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같이 생각해보려 합니다.꿈을 이루고 나서야 시작되는 질문공연이 끝나고 조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기쁨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달랐습니다. "다음엔 뭘 하지?" 라는 물음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돌이켜보면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바라던 .. 2026. 8. 23.
일자리를 내려놓으니 비로소 삶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키루》 살다× 빅터 프랭클 통계조사 지원업무 계약 만료 후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갈 곳이 없었던 날이 종종 있었습니다. 알람을 끄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늘 하루를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을 잃은 것도, 아픈 것도 아닌데, 그냥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1952)를 다시 꺼내 든 건 바로 그 즈음이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여운을 천천히 들여다보려는 사색의 기록입니다.삶의 무게를 처음 느낀 순간, 와타나베처럼와타나베는 30년 넘게 관공서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해온 공무원입니다. 그는 성실했지만, 어느 날 자신이 살아 있다는 실감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위암 선고를 받습니다.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 2026.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