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첫 생일을 보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저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습니다.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과일도 함께 먹었습니다. 남편도 있었고, 웃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나는 며느리에게 어디까지 다가가야 하는 걸까. 가족이 됐다는 건, 서로의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그 질문을 붙들고 있다가,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집》(2019)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영화는 따뜻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유미와 유진 자매는 결국 이사를 갑니다. 하나의 부모는 여전히 다툽니다. 아이들이 온 힘을 다해 '우리집'을 지키려 했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그 노력을 비켜갑니다. 강제 퇴거는 막지 못했고, 가정 불화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따뜻합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그게 이 영화가 '해결'이 아니라 '곁에 있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라고 읽었습니다. 하나가 유미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서 밥 먹자." 그 한 마디가 이 영화 전체를 품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도, 곁에 있을 수는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이 저는 어떤 철학 강의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부버가 말한 '나-너'의 관계, 가족이라는 이름은 상대를 소유할 권리가 아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저서 『나와 너』에서 인간이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나-그것(I-It)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너(I-Thou)의 관계입니다. 나-그것이란, 상대를 분석하고 평가하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상화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나-너란, 상대를 고유한 존재로 있는 그대로 만나는 태도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rtin Buber")
솔직히 처음엔 이 구분이 추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며느리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선명해졌습니다. 제가 며느리를 볼 때 "저 사람은 왜 저런 말투를 쓸까"라고 분석하고 있다면, 그건 나-그것의 관계입니다.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구나"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건 나-너의 관계로 옮겨갑니다.
가족이 됐다고 해서 상대를 내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름이 때로 상대를 '내 사람'으로 만들 권리처럼 착각될 때, 관계는 부담으로 변합니다. 하나의 부모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확신이 오히려 서로를 숨막히게 했을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내가 다 알 수 없다
부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만납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성(Otherness)을 철학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타자성이란, 상대방은 내가 완전히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오래 함께 살았더라도, 아무리 가족이라도, 상대의 내면에는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mmanuel Levinas")
이 관점에서 보면 영화 속 아이들이 새롭게 읽힙니다. 하나는 부모의 갈등을 이해하려 하지만 끝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유미는 엄마가 왜 자신과 동생을 남겨두고 떠났는지를 완전히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서로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하면서도 함께 밥을 먹고, 종이집을 만들고, 울고, 웃습니다. 모른다는 사실이 관계를 막지 않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멈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며느리를 알아가는 것과, 며느리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 사이에는 꽤 큰 거리가 있습니다.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면, 상대가 내 이해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윤리의 출발점입니다. 며느리가 말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어도,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공자의 예(禮)와 선물 고민, 관계에는 적절한 거리가 있다
며느리 생일 선물을 고르면서 저는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너무 적으면 성의 없어 보일 것 같고, 너무 많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았습니다. 결국 휴게소에서 지역 특산물을 하나 골라 남편이 준비한 현금과 함께 건넸습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저는 그것으로 충분했기를 바랐습니다.
이 고민을 생각하다 보니 공자의 예(禮) 개념이 겹쳤습니다. 예란, 단순히 절하고 인사하는 형식적인 예절이 아닙니다. 공자에게 예란 관계에 맞는 적절한 태도와 거리를 조절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친구 사이의 언어와, 부모 자녀 사이의 언어와, 시부모 며느리 사이의 언어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예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nfucius")
이렇게 생각하면 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 차갑거나 소극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강할수록, 그 마음이 때로 상대에게 압력이 된다는 사실을 공자는 아주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좋은 가족관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이렇게 정리해보았습니다.
- 상대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는 것
- 먼저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상대의 속도를 기다리는 마음을 함께 갖는 것
- 관계에 맞는 언어와 거리를 찾아가는 것
- 함께 밥을 먹고 웃는 작은 시간이 쌓이도록 두는 것
어쩌면 선물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날 함께 앉아 밥을 먹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집》의 세 아이가 지키고 싶었던 건 결국 거대한 저택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돌아왔을 때 문을 열어줄 누군가가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며느리와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천천히. 다시 만날 때마다 어제보다 조금 더 편안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가까운 사람에게 지금 다가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 걸음 물러서야 할 때입니까.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 나는 가까운 가족이라는 이유로 상대의 삶과 감정에 너무 깊이 들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 내가 생각하는 ‘좋은 가족’의 모습이 혹시 상대방에게는 부담이 되고 있지는 않을까?
-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것과 한 걸음 물러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필요한가?
참고 자료
- 한국영상자료원, 「우리집」 — 윤가은 감독의 2019년 영화 작품 정보와 줄거리.
- 씨네21, 「우리집」 작품 정보 — 2019년 개봉, 92분, 가족·드라마 장르 및 영화의 기본 줄거리.
- 씨네21, 윤가은 감독 인터뷰 — 가족 문제와 경제적 불안, 아이들의 관계와 성장에 관한 작품 배경.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rtin Buber” — 『나와 너』의 ‘I-Thou’와 ‘I-It’ 관계 철학.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mmanuel Levinas” — 타자와의 만남, 타자의 환원 불가능성과 책임의 철학.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istotle’s Ethics” — 필리아와 가족관계, 함께 살아가는 활동과 행복의 관계.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nfucius” — 공자의 예(禮), 사회적 역할과 관계 속 적절한 행동에 관한 설명.
참고: https://namu.wiki/w/%EC%9A%B0%EB%A6%AC%EC%A7%91(%EC%98%81%ED%99%9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buber/
https://plato.stanford.edu/entries/levinas/
https://plato.stanford.edu/entries/confuci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