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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필로소피74

퇴직 후 풍요로움은 언제 시작되는가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과 아리스토텔레스, 장자의 소요유 명절이 끝나고 저는 도심의 구직자 취업역량교육장을 가기위해 남편이 있는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 앞에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퇴직하면 쉬게 될 줄 알았는데, 왜 이 사람들은 더 바쁘게 사는 걸까. 그리고 왜 나는 그 바쁨이 부러우면서도 내 바쁨은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그 질문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영화가 떠올랐습니다.광고는 아름다웠고, 현실은 낡아 있었다노부인 에블린이 자이푸르 공항을 나서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브로셔 속 호텔은 하얀 아치와 푸른 타일로 빛나고 있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건물은 벽이 허물어지고 전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했습니다. 존 매든 감독의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2011)은 바로 그 순간, 은퇴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정직하게.. 2026. 9. 30.
역사는 누가 이름을 붙이는가 《암살자(들)》와 아렌트의 사실적 진실, 공자의 정명 역사는 사건이 끝난 순간 완성될까요? 아니면 그 사건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비로소 시작될까요?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아들과 점심을 먹고 혼자 영화관으로 들어가면서 저는 그 질문을 미처 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이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그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이름이 현실을 만드는가 — 공자의 정명공자는 정치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명(正名)이라고 답했습니다. 정명이란 '이름을 바로잡는 일'을 뜻합니다.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에 붙인 이름이 실제 모습과 일치하는지 끊임없이 점검하는 태도입니다.《논어》 「자로」 13.3에서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2026. 9. 29.
죽고 싶다는 말을 들은 뒤, 부모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과 돌봄윤리, 그리고 가족이 곁에 있는 방식 "죽고 싶다"는 말을 들은 뒤, 부모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니, 더 정확하게 물어야겠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의 삶을 '해결해주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 있을까요? 저는 한동안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1980년 로버트 레드포드의 영화 《보통 사람들(Ordinary People)》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사랑은 해결이 아니라 관계다 — 돌봄윤리와 캘빈의 무력함 사이에서명절 연휴가 끝나고 아들 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던 길이었습니다. 차 안에서 아들은 회사에 가기 싫다는 말을 반복했고, 말투는 점점 날이 서 갔습니다. 운전 중 과속이 이어졌고,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기도 했습니다. 저는 옆자리에서 아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아들이 말했습니.. 2026. 9. 28.
모두가 힘든데도 우리는 왜 명절에 모이는가 《걸어도 걸어도》와 공자의 예, 그리고 돌봄윤리 밥상 위에 생선이 놓입니다. 어머니가 아침부터 손질한 것입니다. 가족들은 별말 없이 젓가락을 듭니다. 그런데 그 생선이 놓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이 들어갔는지,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2008)를 보다가 저는 이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영화 속 식탁이 이번 추석 명절 시댁 밥상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앉아 있고, 음식은 풍성하고, 그런데 어딘가 아무도 편하지 않은 그 공기.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먼저 영화를 감상하셔도 좋습니다.말하지 않은 것들이 식탁 위에 쌓인다영화는 딱 하루를 담습니다. 오래전 바다에서 세상을 떠난 장남 준페이의 기일, 남은 가족들이 부모 집에 모이는 하루입니다. 차남 료타는 재혼.. 2026. 9. 26.
명절 선물은 사랑일까, 체면일까 《소공녀》와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정말 필요한 것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집보다 위스키와 담배가 중요하다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명절을 앞두고 마트 진열대 앞에 멍하니 서 있던 어느 오후, 저는 그 대사의 의미를 조금 다른 곳에서 만났습니다.집을 포기한 여자가 진짜 지킨 것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먼저 말씀드립니다. 2018년 전고운 감독의 첫 장편 《소공녀》는 가사도우미 미소의 이야기입니다. 새해가 되면서 월세가 오르고 담배와 위스키 가격까지 올랐지만 그녀의 일당은 그대로입니다. 미소는 결국 집을 포기합니다.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지킵니다.처음에 저는 이 선택을 .. 2026. 9. 25.
어르신은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기쁨은 활동 능력이 커지는 상태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남긴 말입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저는 솔직히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가을 장날, 자살예방 캠페인 서포터즈로 나가 설문지를 들고 어르신들 앞에 앉았다가 그 문장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혼자 오신 한 남자 어르신이 "수시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담담하게 적어 주셨을 때였습니다. 그분의 눈에는 불꽃이 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기다리다 지친 사람의 눈빛이었습니다. 사랑이 끊기면 삶의 힘도 같이 가늘어진다는 것을, 그날 저는 설문지 한 장으로 배웠습니다.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추창민 감독, 2011)를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장면들을 더듬어 보려 합니다. 아직 보지 않으신 분께는 결말보다 감정의 결을 이야기.. 2026. 9. 24.
이 나이에 무슨 꿈이냐고 묻는다면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와 보부아르가 말하는 새로운 가능성 "이 나이에 무슨 꿈이야."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도 반박할 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억울하기도 한 그 기분.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를 보고 나서야 그 이상한 감각의 정체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토리의 결말보다는 아다 해리스가 파리에서 마주한 장면들, 그 안에 숨어 있는 철학적 질문에 집중할 것입니다.아다가 드레스 앞에서 멈춘 이유1957년 런던, 가정부 아다 해리스는 고객의 옷장에서 크리스티앙 디올의 드레스를 발견합니다. 앤서니 페이비언 감독은 이 장면을 길게 끌지 않습니다. 아다의 손이 천천히 옷감에 닿고, 카메라는 그 손을 가만히 따라갑니다. 대사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침묵.. 2026. 9. 22.
실업 후에도 나에게 필요한 일은 남아 있을까 《리빙(어떤 인생)》과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 직장을 잃고 나서 처음 며칠은 이상하게 조용했습니다. 아침이 와도 갈 곳이 없고, 해야 할 일의 윤곽이 사라진 느낌. 그 공백 속에서 문득 떠올린 영화가 있었습니다. 2022년 개봉한 《리빙(Living) (어떤 인생)》이었습니다. 올리버 허머너스 감독이 연출하고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본을 쓴 이 작품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2년작 《이키루》를 런던으로 옮긴 영화입니다. 저는 주인공 윌리엄스를 보면서 그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 사실은 제 자신에게 향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사람은 하나의 그릇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 속 윌리엄스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민원을 다른 부서로 넘기는 일을.. 2026. 9. 21.
딸기 모종 하나를 양보하고 생각한 농부의 의미 《The Biggest Little Farm(위대한 작은 농장)》과 레오폴드의 대지윤리 딸기 모종 심기를 양보하면서 저는 멈췄습니다. 아주 작은 순간이었는데,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작두콩 봉지를 식탁에 올려두고 생각했습니다. 농부는 도대체 무엇을 만드는 사람일까. 농산물이라고 대답하면 맞습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합니다. 그 질문을 붙잡고 《The Biggest Little Farm(위대한 작은 농장》을 다시 떠올렸습니다.황무지에서 시작된 질문, 농장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존 체스터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8년을 기록한 이 다큐멘터리는 2019년 미국에서 완성되었고, 한국에서는 2023년에 정식 개봉했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영화 초반, 체스터 부부가 캘리포니아 남부의 황폐한 농지에 처음 발을 디디는 장면이 있습니다. 카메라는 갈라진 흙을 천천히.. 2026. 9. 20.
농촌에 내 일자리가 없는 것일까, 내 자리가 없는 것일까《로컬 히어로》와 삼돌이마을에서 생각하는 귀농의 의미 고용24 화면을 닫으며 저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검색어를 바꿔가며 한 시간쯤 일자리를 찾았는데, 화면을 끄고 나서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농촌에는 정말 나에게 맞는 일자리가 없는 걸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다가, 그날 오후 귀농귀촌 교육에서 들은 영월 삼돌이마을 이야기와 뒤섞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오래전에 본 영화 한 장면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빌 포사이스 감독의 1983년 영화 《로컬 히어로》였습니다.땅을 보던 사람이 장소를 보게 되기까지영화 속 주인공 맥은 미국 텍사스의 석유회사 직원입니다. 회사의 지시로 스코틀랜드 북부 해안 마을 퍼니스를 사들이러 갑니다. 처음 맥에게 그곳은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몇 헥타르인지, 얼마를 제시하면 계약이 성사될지 계산하.. 2026. 9. 19.
나는 누구를 위해 농사를 짓는가 《라이더》(The Rider)와 에피쿠로스가 묻는 노동과 행복의 의미 저는 그 장면에서 손을 멈췄습니다. 브래디가 다 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말 위에 오르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말을 탈 수 없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그 눈빛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없어지면, 나는 누구인가?"클로이 자오 감독의 《라이더》(The Rider, 2017)는 화려한 사고 실험이 아닙니다. 실존했던 카우보이의 이야기를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영화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질문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일을 잃은 사람은 무엇을 잃는가브래디는 로데오 카우보이입니다. 낙마 사고로 두개골에 금속판이 박힌 뒤 의사는 다시 타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짜로 묻는 것은 신체적 위험.. 2026. 9. 13.
시든 채소를 다듬고 나서 <경주기행>을 보았다 — 복수, 애도, 그리고 시간에 관한 짧은 사유 냉장고를 열었을 때, 텃밭에서 가져온 채소들이 반쯤 시들어 있었습니다. 가지, 호박, 양배추. 다듬고 버리고 정리하다 보니 오전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고서 본 영화가 하필 복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시든 채소를 정리하는 일과 8년 된 한을 들고 경주로 향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어딘가 겹쳐 보였습니다. 둘 다,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요.멈춰 있는 시간에 대하여 — 복수는 왜 하고 싶어지는가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장면들을 떠올려 보려 합니다.엄마 옥실은 8년을 기다렸습니다. 막내딸 경주가 돌아오지 않은 그날부터, 가해자가 출소하는 날까지. 그 8년이 얼마나 다른 시간이었을지,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습니다.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복수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 2026.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