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역사는 누가 이름을 붙이는가 《암살자(들)》와 아렌트의 사실적 진실, 공자의 정명

by cinema-1 2026. 9. 29.

역사는 사건이 끝난 순간 완성될까요? 아니면 그 사건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비로소 시작될까요?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아들과 점심을 먹고 혼자 영화관으로 들어가면서 저는 그 질문을 미처 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이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그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이름이 현실을 만드는가 — 공자의 정명

공자는 정치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명(正名)이라고 답했습니다. 정명이란 '이름을 바로잡는 일'을 뜻합니다.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에 붙인 이름이 실제 모습과 일치하는지 끊임없이 점검하는 태도입니다.

《논어》 「자로」 13.3에서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말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설명합니다(출처: 논어 자로편, 한국고전번역원). 영화를 보면서 저는 이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폭동'이라는 이름과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은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세계로 만들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을 '암살자'라고 부르는 것과 '저항자'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제목의 복수형 괄호, '(들)'이 그냥 붙어있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암살자인지, 몇 명인지, 그 이름을 누가 붙이는지 — 영화는 그 질문을 제목부터 열어놓습니다.

공자의 정명은 '내가 원하는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름이 실제와 맞는지 계속 살피라는 경고에 가깝습니다. 그 긴장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공자가 말한 정치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실은 왜 이렇게 취약한가 — 아렌트의 사실적 진실

한나 아렌트는 「진리와 정치」에서 사실적 진실(Factual Truth)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사실적 진실이란 수학 공식처럼 이성으로 증명되는 진리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사람들의 행동처럼 공동의 세계에서 발생한 사실에 관한 진실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날 그 일이 정말 일어났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이 사실적 진실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사건은 한번 일어나면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기록과 증언뿐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권력의 영향에 취약합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annah Arendt). 신문 기사가 삭제되거나, 공식 문서가 봉인되거나, 증언이 침묵으로 대체될 때 — 사건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저는 1970년대에 학교를 다녔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웠고, 텔레비전 뉴스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 제가 접근할 수 있었던 정보의 범위가 오늘과는 달랐다는 것을 지금은 압니다. 어린 시절의 제가 어리석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시대의 기록은 그 방식으로만 전달되었습니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무서운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과 의견은 다릅니다. 의견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적 기반 자체가 흔들리면, 공적인 논의가 성립하는 토대가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른 현실을 살게 됩니다.

두 철학자가 만나는 곳 — 그리고 1974년

공자는 동양, 아렌트는 서양. 공자는 기원전 5세기, 아렌트는 20세기. 그런데 두 사람이 묻는 것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공자는 묻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아렌트는 묻습니다. "우리가 공동의 세계를 유지하려면 사실을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가?"

하나는 이름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기록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둘 모두 언어와 현실의 관계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역사란 단순히 일어난 사건의 목록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기록하고 이름 붙이고 전달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총격이 발생했고 육영수 여사가 그날 사망했습니다. 이것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8·15저격사건으로 기록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의 배후에 관해서는 당시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로 다른 주장이 있었고, 지금도 논쟁적인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영화 《암살자(들)》은 바로 그 간격, 즉 기록된 사실과 채워지지 않은 질문 사이에 가상의 형사 철구, 사회부장 재환, 신입 기자 영일을 세워놓습니다. 허진호 감독은 이 영화가 감춰진 진실을 확정하는 작품이 아니라, 폭력이 지배했던 시대와 진실을 추적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담은 작품이라고 밝혔습니다. 저는 그 말이 솔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판결문이 아니다 — 그래서 더 중요한 질문

역사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점검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 지금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 중에서 개인의 기억과 공식 기록을 구분해본 적이 있는가
  • 어떤 사건에 붙어있는 이름이 그 사건의 실제 내용과 얼마나 가까운가
  • 영화가 제시한 의혹과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을 나는 제대로 분리하고 있는가
  • 모른다고 말해야 할 때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네 번째 항목이 가장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의심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1974년 당시 언론에는 보도지침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것은, 권력이 기록을 통제하더라도 역사적 기억을 완전히 독점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기자들이 기사를 썼고, 학생들이 시위를 기록했고, 시민들이 기억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영화 <암살자들>과 한나 아렌트 및 공자의 철학사상 이미지

 

 

 

역사공부란 연도와 인물을 외우는 일만이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기록했는가", "당시 다른 자료는 무엇이라 했는가", "이것은 사실인가 해석인가 영화적 상상인가"를 묻는 것도 역사공부입니다. 아렌트가 말한 사실적 진실을 보존하려는 태도이고, 공자가 말한 정명을 실천하는 방식입니다.

《암살자(들)》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책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질문 앞에 다시 세워줄 수는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보다 어린 시절의 교실이 더 자주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에는 몰랐던 것을 이제는 다시 물어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저에게 충분히 할 일을 한 셈입니다.

거대한 결론을 서둘러 내리는 것이 역사에 대한 가장 책임 있는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아직 더 알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 기억하되 맹신하지 않고 의심하되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것 — 공자와 아렌트는 시대도 언어도 달랐지만, 그 태도만큼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1974년의 이야기이면서, 오늘 우리가 읽는 뉴스와 인터넷의 기록에도 똑같이 유효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첫째, 내가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가운데 실제 기록과 나의 기억을 구분해 보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개인적인 기억, 공식 기록, 언론 보도, 후대의 해석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둘째, 어떤 사건에 붙어 있는 이름과 실제 내용이 서로 다를 가능성은 없을까요?

공자의 정명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영화가 제시한 의문과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을 나는 제대로 구분하고 있을까요?

영화적 상상력은 질문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판단할 때에는 기록과 증거를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 자료

  • 허진호 감독, 《암살자(들)》(2026).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프로 가상의 형사·기자들이 사건의 의혹을 추적하는 영화입니다. 허진호 감독은 영화가 ‘감춰진 진실의 확정’보다 당시 인물들의 감정과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 초점을 두었다고 설명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15저격사건. 1974년 8월 15일 사건의 경과와 당시 한국·일본의 배후 인식 차이, 이후 역사적 평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Hannah Arendt, “Truth and Politics” 및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annah Arendt. 사실적 진실과 의견의 구별, 정치공동체에서 사실의 중요성에 관한 논의를 참고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유언론실천선언·언론자유수호운동.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 언론 통제와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역사적 배경을 참고했습니다.
  • 《논어》 13.3의 정명(正名)에 관한 연구 자료. 이름과 현실의 관계, 정명의 정치적 의미를 참고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95%94%EC%82%B4%EC%9E%90(%EB%93%A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endt/
https://db.itk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