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모두가 힘든데도 우리는 왜 명절에 모이는가 《걸어도 걸어도》와 공자의 예, 그리고 돌봄윤리

by cinema-1 2026. 9. 26.

밥상 위에 생선이 놓입니다. 어머니가 아침부터 손질한 것입니다. 가족들은 별말 없이 젓가락을 듭니다. 그런데 그 생선이 놓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이 들어갔는지,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2008)를 보다가 저는 이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영화 속 식탁이 이번 추석 명절 시댁 밥상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앉아 있고, 음식은 풍성하고, 그런데 어딘가 아무도 편하지 않은 그 공기.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먼저 영화를 감상하셔도 좋습니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식탁 위에 쌓인다

영화는 딱 하루를 담습니다. 오래전 바다에서 세상을 떠난 장남 준페이의 기일, 남은 가족들이 부모 집에 모이는 하루입니다. 차남 료타는 재혼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옵니다. 딸 지나미도 자기 가족과 함께 옵니다. 그리고 준페이가 목숨을 바쳐 구한 소년 요시오도 매년 찾아옵니다.

아무 사건도 없습니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차를 마시고, 아이들이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대화 사이사이에 작은 말들이 박혀 있습니다. 어머니가 요시오를 보는 눈빛, 아버지가 차남 료타에게 건네는 한마디, 오래된 비교와 후회가 아주 일상적인 언어로 흘러나옵니다.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은 이 영화를 "거대한 사건 없이 요리와 식사, 집안의 소소한 움직임만으로 한 가족 전체의 삶과 후회, 기쁨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이 설명을 읽고 나서야 제가 왜 그 장면에서 멈췄는지 알았습니다. 드라마가 없어서 오히려 더 아팠던 것입니다.

이번 추석도 그랬습니다. 시어머니는 물가가 오른 탓에 지출이 크게 늘었다고 하셨습니다. 형님은 며칠 전부터 내려와 준비하셨고, 갓 결혼한 며느리는 몸살감기에 걸린 채로 장거리 이동을 했습니다. 시아주버님은 말없이 전등을 고치고 먼지를 털었습니다. 싸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조금씩 지쳐 있었습니다.

공자가 말한 효는 음식 열 가지가 아니었다

명절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효(孝)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부모를 찾아뵙고,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밥을 먹는 것. 오랜 동아시아 가족 문화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처음엔 이게 헷갈렸습니다. 이걸 지키면 효도이고, 안 지키면 불효인 건지.

공자의 예(禮)라는 개념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예(禮)란 단순히 의례의 절차나 형식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상대를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그 관계의 언어를 뜻합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공자 항목에 따르면, 공자는 의례 없는 존경이나 애도 없는 장례처럼 형식만 남은 예를 온전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의례를 행하는 사람의 경건함과 진심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음식의 가짓수가 아니라 그 음식을 차리는 마음과 그 마음을 알아주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시어머니가 허리가 아픈데도 열 가지 음식을 차린다면, 그것이 공자가 말한 예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올해는 조금만 해도 돼요, 제가 도울게요"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예에 가까울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가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을 알아차리고 함께 방법을 바꾸는 것, 그것도 효의 한 형태로 읽힙니다.

돌봄은 사랑의 이름으로 숨어 있다

이번 명절에서 가장 마음에 걸린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남편이 제가 친정부모님 봉안당에 가겠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가 막힐 텐데 굳이 가야 해?" 그 말이 서운했습니다.

남편에게 그곳은 막히는 길을 감수해야 하는 이동이었겠지요. 그런데 저에게 봉안당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과 제가 여전히 관계를 이어가는 장소입니다. 같은 장소를 두고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던 겁니다.

돌봄윤리(Ethics of Care)라는 개념이 여기서 도움이 됩니다. 돌봄윤리란 인간을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으로만 보지 않고, 서로 의존하고 돌보면서 살아가는 관계적 존재로 바라보는 윤리적 관점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 않고, 누군가를 돌보거나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가족 안의 돌봄을 다시 보면, 익숙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드러납니다.

  • 어머니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습니까?
  • 형님이 며칠 일찍 내려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왔습니까?
  • 갓 결혼한 며느리가 몸살을 앓으면서도 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왔습니까?

 

영화 <걸어도 걸어도>와 공자의 효사상 이미지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돌봄윤리 항목은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이 개인적·직업적 불이익을 감수하는 문제를 오래전부터 지적해왔다고 설명합니다. 돌봄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특정한 사람에게 집중되기 쉽고, 그 사람의 시간과 건강과 돈이 조용히 소진됩니다. 그래서 돌봄윤리는 "누가 돌보는가"를 묻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Not Yet Available

 

plato.stanford.edu

 

《걸어도 걸어도》의 어머니도 그렇습니다. 해마다 기일 음식을 준비하고, 해마다 요시오를 초대합니다. 그 행동 안에 죽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것이 동시에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도 조용히 보여줍니다. 사랑은 때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형태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명절을 보내며 이 질문 하나를 품고 돌아왔습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아니면 그 희생을 먼저 알아차리는 것일까.

아마 대답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모두가 무언가를 했지만, 누군가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이 명절을 없애지 않고도 명절을 다시 살리는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가족은 완벽하지 않아도 그래도 걷습니다. 서운한 채로, 말 못 한 채로, 그래도 다시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저는 내년 명절엔 먼저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올해는 어떻게 해야 모두가 조금 덜 힘들까요?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첫째, 우리 가족은 명절을 위해 누가 가장 많은 일을 맡고 있을까요?

음식 준비, 이동, 청소, 선물, 비용, 감정적인 조율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역할까지 생각해 보면 가족 안의 돌봄 부담이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둘째, 가족을 위한 ‘의무’ 가운데 지금의 우리 가족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요?

예전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기보다 현재 가족 구성원의 건강과 상황에 맞게 줄이거나 나눌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다음 명절에 가족 모두가 조금 덜 힘들기 위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음식의 양, 선물, 방문 일정, 역할 분담 등 작은 것 하나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고레에다 히로카즈, 《걸어도 걸어도》(Still Walking, 2008). 추모 의례를 위해 모인 한 가족의 하루를 통해 일상의 식사와 집안일 속에 쌓인 가족의 후회와 기쁨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nfucius. 공자의 효(孝)와 예(禮), 가족관계에서의 존중과 진정성, 의례의 도덕적 의미를 참고했습니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Personal Relationship Goods / Ethics of Care. 돌봄을 타인의 필요에 응답하는 관계적 활동으로 보고, 돌봄 부담과 의존, 관계적 삶의 중요성을 다루는 논의를 참고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A%B1%B8%EC%96%B4%EB%8F%84%20%EA%B1%B8%EC%96%B4%EB%8F%84
https://www.criterion.com/films/28643-still-walking
https://plato.stanford.edu/entries/confucius/
https://plato.stanford.edu/entries/care-eth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