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반지의 제왕》이 처음 개봉했을 때 극장 문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가 저와는 거리가 먼 세계라고 생각했거든요. 실화 기반의 드라마나 범죄 스릴러를 더 좋아하는 저에게, 요정과 마법사가 나오는 이야기는 그냥 아이들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작품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프로도가 반지를 들고 걷는 그 여정이, 어느 순간 제 귀촌 준비 과정과 겹쳐 보였습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의 이름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판타지라고 무시했던 제가 틀렸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피터 잭슨 감독이 연출하고 2001년부터 2003년에 걸쳐 세 편이 개봉한 작품입니다. J. R. R. 톨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결말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보려 합니다. 처음에는 프로도라는 작은 호빗 한 명이 절대반지를 파괴하러 나서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저는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프로도는 혼자 갈 수 없었을까. 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도, 가장 용감한 전사도 반지를 대신 들고 갈 수 없었을까.
그 질문을 붙잡고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비로소 이 작품이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톨킨은 1차, 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입니다. 그의 글 안에는 전쟁과 공동체, 그리고 인간의 연대에 대한 아주 깊은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출처: 나무위키, 『반지의 제왕』). 저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판타지라는 껍데기만 보고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거죠.
한나 아렌트가 말한 '함께 행동하는 힘'
이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라는 이름을 꺼내고 싶습니다. 그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로, 전체주의와 인간의 조건에 대해 평생 탐구한 사람입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노동(Labor), 작업(Work), 그리고 행동(Action).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한 반복적인 활동이고, 작업은 도구나 작품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행동, 즉 액션(Action)이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적인 공간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아렌트는 이 행동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고유한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출처: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행동이 반드시 복수(複數)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복수성(Plurality)을 강조했는데, 복수성이란 세상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 다름이 모여야만 진정한 변화가 생긴다는 개념입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강해도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죠.
반지원정대를 생각해보면 이 개념이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호빗, 인간, 엘프, 드워프, 마법사. 이렇게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한 방향을 향해 움직였을 때 비로소 절대반지의 파괴가 가능해졌습니다.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의 행동 자체가 권력(Power)이었습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권력이란 누군가를 짓밟는 힘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행동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절대반지는 왜 사람을 고립시키는가
영화에서 절대반지를 가진 자들을 떠올려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골룸은 수백 년을 혼자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보로미르는 반지의 힘에 홀려 동료를 배신하려 했습니다. 프로도조차 반지를 오래 지닐수록 샘을 의심하고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지는 소유한 자를 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권력에 대해 하는 가장 날카로운 말입니다.
아렌트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절대반지는 폭력(Violence)의 상징에 가깝습니다. 아렌트에게 폭력이란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혼자 목적을 달성하려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폭력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공동체를 해체하고 사용자를 고립시킵니다. 반지가 정확히 그렇게 작동했습니다.
반면 반지를 파괴하는 과정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순간들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샘은 지쳐 쓰러진 프로도를 등에 업고 화산을 올랐습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 아라곤은 절망적인 전세에서도 군대를 이끌고 검은 문 앞에 섰습니다. 승산보다 의리를 택했습니다.
- 간달프는 수많은 순간 희망을 잃은 사람들 곁에서 다시 일어설 이유를 찾아주었습니다.
- 메리와 피핀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역할을 해냈습니다.
누구 하나 빠져도 이 여정은 완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저를 꽤 오래 붙잡았습니다.

오늘 아침, 남편이 곁에 있었습니다
이 에세이를 쓰게 된 데는 사실 아주 사소한 계기가 있습니다.
오늘 갑자기 휴대폰이 완전히 먹통이 됐습니다. 귀촌 생활을 하다 보면 차량도 없고, 연락도 끊기고, 혼자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옵니다. 마침 시어머니 농사일을 도우러 왔던 남편이 제 상황을 보고는 같이 수리점에 가주었습니다. 개통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는데도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평소에 남편을 나와 너무 다른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생각하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모든 걸 혼자 결정하고 혼자 해결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수리점에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가 어려울 때마다 남편은 늘 조용히 거기 있었다는 것을.
귀촌을 준비하면서도 그랬습니다. 지원사업에 탈락하고, 토지 문제로 헤매던 시기에 힘이 되었던 건 제 의지만이 아니었습니다. 교육에서 만난 동료들의 한마디, 먼저 정착한 선배의 전화 한 통이 저를 다시 일으켰습니다. 제가 프로도였다면 그 선배들은 저의 간달프였던 셈입니다.
아렌트는 이런 만남 속에서 새로운 시작(Natality)이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나탈리티란 어원 자체가 탄생을 뜻합니다. 누군가와 진정으로 연결되는 그 순간, 그 관계 안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개념입니다. 오늘 수리점에서 남편 옆에 앉아 있던 그 시간이 저에게는 그런 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라도 어렵고 힘든 일을 혼자 쥐고 있기보다 먼저 말을 꺼내는 연습을 해보려 합니다. 프로도가 샘에게 등을 맡겼듯이.
《반지의 제왕》은 결국 이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지금 당신 곁에서 조용히 기다려주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저는 오늘에야 그 얼굴을 제대로 본 것 같습니다. 판타지 영화가 이런 질문을 건넬 줄은, 솔직히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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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 질문
나는 어려운 일을 혼자 해결하려고만 하지는 않는가?
지금 내 삶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공동체의 힘은 개인의 능력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참고: https://namu.wiki/w/%EB%B0%98%EC%A7%80%EC%9D%98%20%EC%A0%9C%EC%9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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