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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침묵할 때, 한 사람은 왜 끝까지 진실을 말했을까 《다크 워터스》 × 칸트

by cinema-1 2026. 7. 30.

"네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칸트가 남긴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솔직히 너무 당연한 말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크 워터스》(2019, 토드 헤인즈 감독)를 보고 나서야 이 말이 실제로 얼마나 무거운 요구인지 실감했습니다.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한 장면부터 다시 들여다보려 합니다.

프라이팬 속에 숨겨진 독, 그리고 첫 번째 균열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환경 고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뉴스에서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 즉 주부들이 매일 쓰는 프라이팬 코팅에 발암 가능성이 있는 과불화화합물(PFOA)이 들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콘택트렌즈, 아기 매트, 방수 옷감. 우리 삶 가장 가까운 곳에 그것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공포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다른 방향에서 저를 붙잡았습니다. 변호사 롭 빌럿(마크 러팔로 분)이 처음 뒤폰의 내부 문서 박스들을 받아 창고 같은 방에 혼자 앉아 읽기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카메라는 그를 멀리서 보여줍니다. 조명도 칙칙하고, 옆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소리도 지르지 않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읽습니다. 페이지를 넘깁니다. 또 읽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영웅은 보통 결정적인 순간에 일어서는 장면으로 묘사되는데, 이 영화는 달랐습니다. 그는 그냥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그 지루함과 고집스러움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칸트가 말한 의무란 무엇인가

칸트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입니다. 정언명령이란 결과에 상관없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도덕의 원칙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이렇게 하면 이득이 되니까 하겠다"가 아니라 "이것이 옳기 때문에 한다"는 태도입니다. 조건이 붙지 않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정언(定言)'이라는 말을 씁니다(출처: 임마누엘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 백종현 역, 아카넷).

칸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의무(Duty)라는 개념도 강조합니다. 의무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옳다고 판단했을 때 끝까지 책임지는 행위입니다. 두렵고, 손해가 예상되고, 주변 모두가 그만하라고 해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칸트가 말하는 의무의 핵심입니다.

롭 빌럿의 이야기는 바로 이 의무가 얼마나 소모적이고 외로운 것인지를 16년이라는 시간 위에 펼쳐 보입니다. 그는 이길 확신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패배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했습니다. 그 이유가 저는 내내 궁금했습니다.

 

 

영화 <다크 워터스>와 칸트의 사상 이미지

 

청문회와 창고 사무실, 닮은 두 풍경

 

최근 한국 축구 관련 청문회 장면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이상하게 《다크 워터스》의 한 장면이 겹쳐 보였습니다. 질문을 받는 사람들이 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 표정. 변명이 변명을 낳고, 말이 말을 덮는 그 구조.

저도 얼마 전 단기 일자리에서 비슷한 상황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관리자가 잘못을 저질렀고, 몇몇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참는 사람, 이미 포기한 사람, "괜히 나섰다가 나만 손해"라고 중얼거리는 사람. 저 역시 쉽게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생계가 있고, 이후의 관계가 있고, 그 자리를 떠난 뒤의 삶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내가 침묵하는 이유는 신중해서인가, 아니면 손해가 두려워서인가." 그 두 가지는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유입니다. 칸트라면 그 차이야말로 도덕의 출발점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도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거대한 악은 악마 같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멈춘 평범한 사람들의 침묵과 순응에서 자란다는 개념입니다(출처: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뒤폰이 수십 년간 진실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은 한두 명의 악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원칙이 쌓이는 방식

그렇다면 우리에게 롭 빌럿처럼 살라고 요구하는 것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묻는 것은 훨씬 낮은 곳에 있다고 읽힙니다.

칸트는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도덕법칙(Moral Law)이란 외부에서 강제하는 규칙이 아니라 내 안의 양심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거창한 영웅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내 자리에서 양심을 지킬 수 있는가, 그것을 묻는 말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는 장면은 사실 법정 장면이 아닙니다. 롭 빌럿이 아내에게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는 말을 들으며 잠시 멈추는 장면입니다. 그는 거기서 연설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다시 서류를 집어 듭니다. 그 단순한 행동 하나가 저는 오히려 더 오래 남았습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원칙들을 생각해보면, 크고 극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1. 확인하지 않은 소문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것
  2. 작은 편의를 위해 내가 아는 사실을 슬쩍 바꾸지 않는 것
  3. 침묵을 선택할 때 그 이유를 한 번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
  4. 잘못을 본 뒤 "나는 당사자가 아니니까"라는 말로 끝내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쌓여야 한 사람의 품격이 만들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 무모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계란이 쌓이면 무게가 달라집니다. 롭 빌럿 혼자 16년을 버텼지만, 결국 수만 명의 피해자가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였습니다. 아직도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정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질문 자체를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제가 이 영화로부터 가져온 가장 작은 약속입니다. 양심은 한 번에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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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 질문


모두가 침묵할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현실적인 손해와 양심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우선할 수 있을까?
오늘 내가 지킬 수 있는 가장 작은 원칙은 무엇인가?


참고: https://namu.wiki/w/%EB%8B%A4%ED%81%AC%20%EC%9B%8C%ED%84%B0%EC%8A%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