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계약이 끝났습니다. 짐을 챙겨 나오면서 저는 이상하게도 니나 생각을 했습니다. 발레리나 니나. 완벽한 백조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그 여자. 퇴직 후 3년째, 몇 달짜리 계약직을 전전하면서 제가 느끼는 이 허전함이 꼭 그녀의 표정과 닮아 있었습니다. 뭔가를 열심히 했는데,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은 그 느낌. 《블랙 스완》을 다시 떠올린 건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무너지는 것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것
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결말보다는 그 과정, 니나의 내면이 어떻게 갈라지는가를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2010년 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발레라는 장르를 선택했습니다. 발레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철저한 통제 위에 서 있습니다. 니나는 바로 그 통제를 완성하려다가 무너집니다. 완벽한 백조 역할은 해낼 수 있지만, 자유로운 흑조는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그 얼굴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0년 넘게 다닌 직장에서 퇴직하고,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땄을 때 저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이제 뭔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3개월 만에 그 자격증은 쓸모를 잃었습니다. 한국어교원 2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취득은 했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세먼지 감시원과 통계조사요원으로 연명하듯 일했습니다. 백조가 되려 했는데, 흑조는커녕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셈이었습니다.
자기기만(Self-decep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기만이란 자신의 진짜 상태나 감정을 스스로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뜻합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거짓말과 구분합니다.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니까요. 니나는 불안하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완벽하면 괜찮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자기기만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쓸 만하다고, 자격증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고 믿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절망의 세 얼굴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통로로 읽었습니다. 절망이란 여기서 단순히 슬프거나 우울한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어긋나 있는 실존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실존적(existential)이란 말은 거창하게 들리지만, 쉽게 말하면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에 관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절망을 세 단계로 나눴습니다.
- 자기를 모르는 절망 — "나는 그냥 이렇게 살아왔어"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에게 무관심한 상태입니다.
- 자기를 싫어하는 절망 — "나는 부족해, 나는 왜 이 모양이야"라는 자기혐오가 반복되는 단계입니다.
- 자기를 받아들이는 절망 —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자기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의 통찰이 빛납니다. 세 번째 단계도 여전히 절망이라는 점입니다. 치유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도망치지 않는 절망, 그것이 진짜 자유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출처: 쇠렌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니나의 여정을 이 틀로 다시 보면 영화가 다르게 읽힙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첫 번째 단계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안한지 몰랐거나, 알면서도 몰랐습니다. 그러다 두 번째 단계가 찾아옵니다. 나는 흑조가 될 수 없다, 나는 부족하다는 공포가 그녀를 잠식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그녀는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합니다. 그 도달이 파국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 길이 너무 늦게 왔고 너무 가팔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 걸까요. 솔직히 아직 두 번째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 경력이 없어서 안 된다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맴돌 때면, 그건 제가 저 자신을 싫어하는 절망의 언어입니다. 영화를 보며 그걸 처음으로 말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절망 안에 앉아 있는 법 — 현실로 돌아와서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자아 정체성에 대한 성찰은 50~70대에 가장 깊어진다고 합니다(출처: PNAS, Emotional Stability and Self-Reflection Study). 나이가 들수록 자기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화의 증상이 아니라, 자기 인식이 성숙해지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처음엔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조금은 달라집니다.
퇴직 전의 30년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직위가 있었고, 조직이 있었고, 내일 무엇을 할지 누군가 알려줬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아무도 제게 "당신은 이걸 하세요"라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공허하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제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라면 이 불편함을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신호"로 읽었을 것입니다.
50~60대 뿐만이 아니라20~30대 독자분들에게도 이 지점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취업이 안 될 때, 선택이 틀린 것 같을 때, 주변은 앞서가는 것 같은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을 때. 그 감각이 바로 절망의 두 번째 단계와 닮아 있습니다. 세대는 달라도,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는 그 느낌은 같은 언어를 씁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히 서는 것을 미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로의 도약이라고 불렀습니다. 미적 단계란 쾌락과 감각,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사는 삶을 뜻합니다. 윤리적 단계란 그 시선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입니다. 니나는 끝내 그 도약을 완성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완성하는 순간이 너무 짧았거나.
그 도약을 향해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 오늘 제가 한 선택 중 "남들이 좋다고 해서" 한 것은 무엇인가.
- 최근 "제가 좋아서" 시작한 것은 무엇인가.
- 지금의 허전함이 실패의 신호인지, 아니면 다른 자기를 만나는 과정인지.
거창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작은 물음들이 자기를 모르는 절망에서 자기를 받아들이는 절망으로 넘어가는 징검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계약이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온 길에, 저는 오래 걸었습니다. 허전했지만 이상하게 선명했습니다. 니나가 마지막에 느꼈을 그 감각이 이런 것이었을까, 잠깐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절망이 끝이 아니라 어딘가로 가는 입구라면, 저는 지금 그 입구 앞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에 계십니까.
참고: https://namu.wiki/w/%EB%B8%94%EB%9E%99%20%EC%8A%A4%EC%99%84(%EC%98%81%ED%99%94)
https://www.pnas.org/doi/10.1073/pnas.161149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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