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에린 브로코비치》 ×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무엇일까

by cinema-1 2026. 7. 25.

"당신들 건강이 망가지는 동안 그 회사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했어요. 정말 그게 사실인지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에린 브로코비치가 주민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리모컨을 내려놓았습니다. 대단한 연설도 아니고, 어떤 선언도 아닙니다. 그냥 한 사람이 눈을 똑바로 뜨고 사실을 확인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순간이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이 영화가 정의에 대해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감각을 조금 더 들여다보려 합니다.

호랑이가 없어진 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요즘 제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 꽤 큰 일이 있었습니다. 총책임자의 부당한 요구와 금품 수수 문제가 불거졌고, 그 사람은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저는 이 업무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과정의 안팎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들이, 그 자리가 비자마자 화기애애하다 못해 의기양양한 분위기로 돌아서더군요. 총책임자의 자리에 앉아 크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속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이다'라는 말.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기뻐해야 할지, 불편해해야 할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 감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위해 며칠을 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에린 브로코비치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기업의 비리가 드러나고 마을이 뒤집히는 순간, 분노와 기쁨과 슬픔이 뒤섞이는 장면들. 누군가에게는 승리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진짜 정의의 완성인가 하는 물음이 그 안에 조용히 깔려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물음에 하나의 개념으로 답합니다. 바로 덕(Arête)입니다. 덕이란 단순히 나쁜 것이 제거된 상태가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반복해서 행동함으로써 쌓아 올려지는 인격을 말합니다. 악인이 사라지는 것 자체는 덕의 완성이 아닙니다. 그 이후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덕의 진짜 시험대입니다. 저는 지금 그 시험대의 한가운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린은 왜 분노하지 않고 기록했는가

에린은 법률 전문가가 아닙니다. 변호사 자격도, 환경 과학 지식도 없습니다. 세 아이를 혼자 키우는 싱글맘이고, 취업도 잘 안 되고, 돈도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서류 뭉치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분노해서 고함을 지를 수도 있었고,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 일은 이것이었습니다.

  • 주민들을 직접 찾아가 한 사람씩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의료 기록과 기업 내부 자료를 대조하며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 전문가에게 자료를 들고 가 의견을 물었습니다.
  • 변호사들과 계속 논의하며 증거를 쌓았습니다.
  • 충분히 준비될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목록을 보고 있으면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감정보다 과정이 먼저라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프로네시스(Phronesis)입니다. 프로네시스란 실천적 지혜를 뜻합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머리가 좋은 것과는 다릅니다. 지식이 많은 것과도 다릅니다. 상황을 읽고, 서두르지 않고, 책임 있게 판단하는 그 능력이 프로네시스입니다(출처: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솔직히 처음엔 에린이 답답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습니다. 이미 기업이 잘못했다는 게 보이는데, 왜 저렇게 천천히 확인하고 또 확인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놓고 보니, 그 느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 때, 인간의 본능은 빠르게 반응하고 싶어합니다. 분노하거나, 편을 정하거나, 지금 당장 판단을 내리고 싶어합니다. 그 충동을 이겨내고 일주일을 더 지켜보기로 결심하는 것, 그게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Courage)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말합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무모하게 돌진하지 않고, 그렇다고 비겁하게 뒤로 빠지지도 않는, 그 중간 어딘가에 자리 잡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걸 중용(中庸)이라고 불렀습니다. 중용이란 단순히 타협하거나 애매하게 처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맞는 가장 올바른 지점을 찾아내는 덕목입니다. 에린이 보여준 것이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당장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지만 기다렸고,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갔습니다(출처: 스탠퍼드 철학 백과, Aristotle's Ethics).

제가 지금 조직 안에서 느끼는 불편함도 비슷한 자리에 있습니다. 잘못이 있었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펼쳐지는 풍경이 '정의의 완성'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 그렇다고 그 감각을 지금 당장 말로 꺼내는 것이 옳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일주일이 남아 있고, 저는 아직 이 조직의 맥락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더 보는 것, 더 들어두는 것, 그것이 지금 저에게 필요한 프로네시스일 것입니다.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철학사상 이미미

 

 

에린이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보여준 태도가 있습니다. 판단을 내려놓고 그냥 듣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정의(Justice)의 기본 조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의란 상대를 수단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대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봤습니다. 거창한 싸움이 아니라, 앞에 앉은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 그게 시작이라는 말이 지금 제게는 꽤 묵직하게 들립니다.

영화는 결국 거대 기업을 상대로 한 법정 승리로 끝납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장면은 그 승리의 순간이 아닙니다. 에린이 낡은 차를 몰고 주민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커피 한 잔을 받아들며 이야기를 듣던 그 장면들입니다. 정의는 그 반복되는 작은 행동 속에 이미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이란 결국 그런 것입니다. 한 번의 결정이 아니라, 반복되는 선택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무언가. 오늘의 판단이 내일의 인격이 되고, 그 인격이 모여 공동체의 윤리가 된다는 것.

저는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됐습니다. 부당함이 사라지는 것은 시작입니다. 그 이후를 어떻게 채우느냐가 진짜 이야기입니다. 에린이 보여준 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도,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정의는 적을 몰아낸 뒤에도 계속 질문되어야 한다는 것.

그 질문을 이번 주도 품고 가보려 합니다. 이 선택이 두려움 때문인가, 아니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판단 때문인가, 하고.

 

생활 속에 적용해 볼 아이디어

  • 불의를 보았을 때 즉시 판단하기보다 먼저 사실을 확인해 보세요.
  • 감정적인 분노보다 책임 있는 행동이 더 큰 변화를 만듭니다.
  • 작은 원칙을 꾸준히 지키는 습관이 결국 신뢰를 만듭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 나는 부당한 일을 보았을 때 무모하게 행동하는 편인가, 지나치게 침묵하는 편인가?
  • 정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일까, 지혜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 오늘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정의로운 행동은 무엇일까?

참고: https://namu.wiki/w/%EC%97%90%EB%A6%B0%20%EB%B8%8C%EB%A1%9C%EC%BD%94%EB%B9%84%EC%B9%98(%EC%98%81%ED%99%9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istotle-ethics/
https://www.yes24.com/Product/Goods/4444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