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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진실을 보면서도 외면하는가 《돈 룩 업》 × 하이데거

by cinema-1 2026. 8. 6.

두 과학자가 대통령 집무실에서 허둥지둥 설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혜성이 온다고, 몇 달 안에 지구와 충돌한다고, 확률이 아니라 확정이라고. 그런데 대통령은 선거 일정을 꺼내 듭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웃겨야 하는데 웃기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뉴스 속에서, 혹은 제 일상에서.

이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왜 진실을 보면서도 외면하는가

영화 《돈 룩 업》은 2021년 애덤 맥케이 감독이 연출했습니다. 혜성 충돌이라는 설정은 사실 기후위기의 메타포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기후위기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왜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걸까, 라는 질문입니다.

솔직히 처음엔 이 영화가 그냥 풍자 코미디인 줄 알았습니다. 웃으면서 보다가 끄면 그만인 영화.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에어컨 틀어 놓고 쓰면서, 저 자신이 영화 속 군중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직장도 없이 집에 있는 주제에 조금만 틀어야지 하면서 결국 하루 종일 켜 놓는 그 행동이, 혜성을 보고도 SNS나 하는 영화 속 사람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여기서 하이데거의 개념이 들어옵니다. 존재의 망각(Forgetfulness of Being). 여기서 존재의 망각이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살아가는지를 잊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단순히 건망증이 아닙니다. 일과 소비, 속도와 성과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구조적인 둔감함입니다(출처: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영화 속 사람들도 정확히 그 상태입니다. 혜성보다 주가가 중요하고, 지구의 종말보다 유명인의 열애설이 더 많이 공유됩니다. 그들이 바보여서가 아닙니다. 시스템 자체가 그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을 잊게 만드는 구조 속에서, 누구도 의도적으로 외면하지 않았는데 다 함께 외면하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이런 삶의 방식을 세인(Das Man)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인이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라는 논리로 살아가는 익명의 군중을 뜻합니다. 특정 누군가가 아니라, 분위기와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세인입니다. 영화에서 "Don't Look Up"을 외치는 사람들이 악인이 아닌 것처럼. 그냥 흐름을 따랐을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이 장면에서 멈춘 이유가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에 이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당시 공장이 멈추고 이동이 줄자 하늘이 맑아졌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베네치아 운하에 물고기가 돌아왔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인간의 활동이 잠시 멈추자 자연은 스스로 회복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자연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위기가 또 다른 위기의 해결책이 된 그 역설이, 《돈 룩 업》의 혜성과 너무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영화 <돈룩업>과 하이데거의 철학사상 이미지

 

기술은 편리함을 줬지만,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영화의 후반부에 거대 IT 기업 CEO가 등장합니다. 혜성을 없애는 대신, 그 안에 있는 희귀 광물을 채굴하겠다고 합니다. 지구가 사라질 위기에서도 사업 기회를 계산하는 그 장면은 황당해 보이지만, 실제로 소행성 광물 채굴을 논의하는 기업들이 이미 존재합니다. 영화가 풍자하는 건 허구가 아니라 현실의 논리입니다.

하이데거는 기술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판한 것은 기술적 사고방식(das Gestell)입니다. 기술적 사고방식이란, 모든 존재를 효율과 수치와 자원으로 환원해 바라보는 태도를 뜻합니다(출처: 마르틴 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Die Frage nach der Technik)). 숲은 목재가 되고, 강은 발전량이 되고, 사람은 생산성 지표가 됩니다. 혜성도 재앙이 아니라 광산이 됩니다.

올여름 텃밭에 나갔다가 든 생각이 있습니다. 며칠 물을 늦게 줬을 뿐인데 작물이 축 처져 있었습니다. 예전엔 그냥 넘겼을 텐데, 이번엔 문득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자연이 변한 걸까, 아니면 제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이 변한 걸까, 라는 질문. 어느 순간부터 흙을 생산 수단으로만 봤던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의 본래성(Authenticity) 개념이 연결됩니다. 본래성이란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의 흐름이 아니라, 스스로 진실을 직면하며 살아가는 태도를 뜻합니다. 남들 다 에어컨 트니까, 남들 다 비행기 타니까라는 논리 대신, 내가 지금 이 선택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 그게 시작입니다.

영화 속 두 과학자가 결국 선택한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인기가 없어도, 조롱받아도 진실을 말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세인의 흐름에서 이탈하는 것, 그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삶의 첫걸음입니다.

환경보호를 둘러싼 문제를 생각할 때, 저는 이런 점들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 기후위기는 수십 년 전부터 예고됐지만, 매번 경제와 정치의 뒤로 밀렸습니다.
  • 환경이 다른 목적의 도구가 될 때, 즉 정치적 수사나 기업 이미지로 소비될 때 정작 환경 자체는 뒤로 밀립니다.
  • 개인의 실천이 작아 보여도, 진실을 자각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시작점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을 직면할 때 비로소 본래적으로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혜성이 오는 걸 알면서도 가족과 식탁에 앉아 감사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이 바로 그때입니다. 모든 걸 알면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됐을 때.

기후위기가 그 순간을 우리에게 강제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그 질문을 꺼낼 수 있을까요.

《돈 룩 업》이 결국 묻는 것은 혜성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하늘을 보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저는 오늘 에어컨을 끄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만큼은 끄지 않으려 합니다. 작은 차이처럼 보여도, 자각과 외면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독자 여러분은 지금 어느 쪽에 더 가까이 서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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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 질문

  • 나는 기후위기를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 편리함을 위해 무엇을 당연하게 희생하고 있는가?
  • 지금 내 삶은 '남들이 사는 방식'인가, 아니면 내가 선택한 삶인가?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B%8F%88_%EB%A3%A9_%EC%97%85
https://www.yes24.com/Product/Goods/5987326
https://www.yes24.com/Product/Goods/77867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