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55 딸기 모종 하나를 양보하고 생각한 농부의 의미 《The Biggest Little Farm(위대한 작은 농장)》과 레오폴드의 대지윤리 딸기 모종 심기를 양보하면서 저는 멈췄습니다. 아주 작은 순간이었는데,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작두콩 봉지를 식탁에 올려두고 생각했습니다. 농부는 도대체 무엇을 만드는 사람일까. 농산물이라고 대답하면 맞습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합니다. 그 질문을 붙잡고 《The Biggest Little Farm(위대한 작은 농장》을 다시 떠올렸습니다.황무지에서 시작된 질문, 농장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존 체스터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8년을 기록한 이 다큐멘터리는 2019년 미국에서 완성되었고, 한국에서는 2023년에 정식 개봉했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영화 초반, 체스터 부부가 캘리포니아 남부의 황폐한 농지에 처음 발을 디디는 장면이 있습니다. 카메라는 갈라진 흙을 천천히.. 2026. 9. 20. 농촌에 내 일자리가 없는 것일까, 내 자리가 없는 것일까《로컬 히어로》와 삼돌이마을에서 생각하는 귀농의 의미 고용24 화면을 닫으며 저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검색어를 바꿔가며 한 시간쯤 일자리를 찾았는데, 화면을 끄고 나서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농촌에는 정말 나에게 맞는 일자리가 없는 걸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다가, 그날 오후 귀농귀촌 교육에서 들은 영월 삼돌이마을 이야기와 뒤섞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오래전에 본 영화 한 장면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빌 포사이스 감독의 1983년 영화 《로컬 히어로》였습니다.땅을 보던 사람이 장소를 보게 되기까지영화 속 주인공 맥은 미국 텍사스의 석유회사 직원입니다. 회사의 지시로 스코틀랜드 북부 해안 마을 퍼니스를 사들이러 갑니다. 처음 맥에게 그곳은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몇 헥타르인지, 얼마를 제시하면 계약이 성사될지 계산하.. 2026. 9. 19. 나는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한국 영화 《인턴》과 보부아르가 바라본 나이와 일의 의미 버스를 놓쳤습니다. 영화 시작 시간은 다가오는데, 다음 버스를 기다리다간 첫 장면을 통째로 날릴 것 같았습니다. 결국 택시를 탔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이동 시간이 이 글 전체를 만들었습니다. 택시를 운전하시던 기사님이 "저 66세인데, 75세까지는 일해야죠"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영화관을 나온 뒤에도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75세까지 일해야지'가 아니라 '75세까지는 일할 거야'였습니다. 그 온도 차이가 작지 않았습니다.37년 경력자가 다시 인턴이 된다는 것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 없이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 있어서요.2026년 9월 16일 개봉한 한국 영화 《인턴》에서 최민식이 연기하는 기호는 37년간 직장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젊은 CEO 선.. 2026. 9. 18. 달빛아레, <시네마 천국>, 떠남과 뿌리 사이 — 지역소멸의 도시에서 영화음악을 들으며 시몬 베유와 웬델 베리에게 '남는 일'의 의미를 묻다 영사실에서 흘러나온 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순간, 어른이 된 토토는 혼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 한 통. 수십 년 전 신부의 손에 잘려 나간 키스 장면들을 몰래 이어 붙인 그것.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그가 흘리는 눈물이 성공한 감독의 감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린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뿌리내림과 뿌리 뽑힘, 떠남과 남음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서 본 그 자리.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자리를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려 합니다.알프레도는 왜 "돌아오지 말라"고 했을까영화 속에서 알프레도는 고향 마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은 저주받았다." 그러면서 청년 토토에게 단호하게 이릅니다. 돌아오지 말라고, 우리를 생각.. 2026. 9. 17. 나는 이 삶을 선택한 것일까 The Spirit of the Beehive 《벌집의 정령》과 하이데거로 바라본 ‘떠밀려 온 삶’과 새로운 가능성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어딘가에 던져져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솔직히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철학 책 속 어느 관념적인 선언처럼 들렸거든요. 그런데 사과밭에서 사과를 따다가, 불현듯 그 말이 이해됐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정말 제가 선택한 것이었을까요?벌집에도 질서는 있다, 하지만 자유는 없다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1973년 작 《벌집의 정령(The Spirit of the Beehive)》은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영화입니다.스페인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40년대, 카스티야의 황량한 시골 마을. 일곱 살 소녀 아나는 마을에서 상영된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커다란 혼란에 빠집니다. 언니 이사벨은 "괴물은 죽은 게 아니라 정령이 되었다"고 말하고,.. 2026. 9. 16.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가능한 사랑》과 아리스토텔레스/키르케고르가 묻는 귀농의 선택 고구마를 다 캐고 난 뒤 텅 빈 밭을 바라보다가, 저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흙만 남은 밭이 이상하게도 지금 제 삶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뭔가 끝났는데, 다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 상태. 귀농인의 집 계약이 끝나가고, 월세 집이 나왔다는 소식이 왔고, 구직도 뜻대로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복잡한 마음 속에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영화 뉴스처럼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소식이 저를 한 시간 넘게 붙잡아두었습니다. 이창동이 선택한 새로운 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지혜 《가능한 사랑》은 해고 노동자 부부와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가 만나면서 서로의 삶과 욕망을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노동, 계급, 관계의 균열을 다룬다고 하.. 2026. 9. 15. 귀농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농가일기》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새로운 삶 저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한 장면에서 손을 멈췄습니다. 이근혁 씨가 농민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와 조용히 다투는 장면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 불편함이 오래 남았습니다. 귀농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아니 새로운 삶을 시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장면에서 무언가를 느낄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농촌은 풍경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농촌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왜 다시 그 땅으로 들어가는가. 낭만이라고 보기에도 어렵고, 단순한 도피라고 보기에도 석연치 않았습니다.이근혁 씨가 연고도 없는 충남 부여 삽티마을에 발을 들인 건 1998년이었습니다. 농사와 농민운동,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겠다는 꿈을 안고서요... 2026. 9. 14. 나는 누구를 위해 농사를 짓는가 《라이더》(The Rider)와 에피쿠로스가 묻는 노동과 행복의 의미 저는 그 장면에서 손을 멈췄습니다. 브래디가 다 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말 위에 오르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말을 탈 수 없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그 눈빛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없어지면, 나는 누구인가?"클로이 자오 감독의 《라이더》(The Rider, 2017)는 화려한 사고 실험이 아닙니다. 실존했던 카우보이의 이야기를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영화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질문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일을 잃은 사람은 무엇을 잃는가브래디는 로데오 카우보이입니다. 낙마 사고로 두개골에 금속판이 박힌 뒤 의사는 다시 타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짜로 묻는 것은 신체적 위험.. 2026. 9. 13. 사람이 사라진 마을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킬 수 있을까 《Ek Tha Gaon 엑 타 가온 》으로 바라본 지방소멸과 하이데거의 ‘거주’ "건축하는 것이 곧 거주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가 남긴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는 솔직히 너무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거주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그런데 평일 오후, 농촌 바자회가 끝난 뒤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그 말이 갑자기 다르게 들렸습니다. 운동장은 있었습니다. 부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자마자 그 공간은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건물은 남아 있는데 생활이 사라지는 풍경. 《Ek Tha Gaon》은 바로 그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 다큐멘터리입니다.이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보지 않으신 분들도 충분히 따라오실 수 있도록 장면을 최소한으로만 언급하겠습니다. 마을이 비어간다는 것, 그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 2026. 9. 12. 시든 채소를 다듬고 나서 <경주기행>을 보았다 — 복수, 애도, 그리고 시간에 관한 짧은 사유 냉장고를 열었을 때, 텃밭에서 가져온 채소들이 반쯤 시들어 있었습니다. 가지, 호박, 양배추. 다듬고 버리고 정리하다 보니 오전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고서 본 영화가 하필 복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시든 채소를 정리하는 일과 8년 된 한을 들고 경주로 향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어딘가 겹쳐 보였습니다. 둘 다,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요.멈춰 있는 시간에 대하여 — 복수는 왜 하고 싶어지는가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장면들을 떠올려 보려 합니다.엄마 옥실은 8년을 기다렸습니다. 막내딸 경주가 돌아오지 않은 그날부터, 가해자가 출소하는 날까지. 그 8년이 얼마나 다른 시간이었을지,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습니다.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복수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 2026. 9. 11. 아들이 음식을 거절했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가족》 × 퇴계 이황 가족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피에서 올까요, 아니면 함께 밥을 먹은 시간에서 올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질문 앞에서 꽤 오래 멈췄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들이 제가 만든 단호박 수프를 단칼에 거절했을 때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오히려 이상했습니다.사랑은 동사인가, 명사인가가족을 혈연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과 제도도 그렇게 규정합니다. 그런데 철학은 늘 조금 더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그냥 느끼는 것이 아니라, 훈련하고 선택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가족》의 인물들은 이 말을 몸으로 살아냅니다. 피 한 방.. 2026. 9. 10. 전쟁은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한 아이의 꿈까지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길가메시의 꿈》 × 알베르 카뮈 "시지프는 행복했을 것이다." 카뮈가 이 한 문장을 썼을 때, 저는 처음엔 그게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평생 바위를 굴려 올리고 또 굴러 내려오는 걸 반복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니요. 그런데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폐막식이 끝나고 혼자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그 문장이 갑자기 다르게 읽혔습니다. 그날 본 영화 때문이었습니다.티그리스 강가에서 아이가 바라본 것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의 초반부, 아홉 살 소년 춤춤이 강가에 쪼그려 앉아 물 위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이의 눈은 강물이 아니라 강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습니다. 감독 모하메드 알 다라지는 그 시선을 카메라로 쫓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의 등을 오래, 천천히 담습니다.저는 그 등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가 .. 2026. 9. 9. 이전 1 2 3 4 5 6 ··· 2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