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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와 하버마스 — 교실에서 대화는 왜 실패하는가

by cinema-1 2026. 6. 17.

✔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영화 《클래스》가 왜 지금 교육 현실과 닮아 있는가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은 무엇인가
민주주의와 교육은 왜 대화를 필요로 하는가
학교에서 권위와 자유의 균형은 왜 어려운가
학생 참여와 소통은 왜 점점 약해지고 있는가

 

솔직히 첫 관람에선 당혹감이 먼저였습니다. 〈클래스〉는 극적인 반전도, 감동적인 화해 장면도 없습니다. 로랑 캉테 감독은 카메라를 교실 안에 고정해두고 그냥 지켜봅니다. 교사와 학생들이 말하고, 끊고, 무시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과정을. 영화가 끝나고서야 알았습니다. 이건 학교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우리가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 자체를 묻고 있었구나.


교실이라는 소우주 — 말이 권력이 되는 공간

〈클래스〉의 배경은 파리 외곽의 한 중학교입니다. 이민자 가정 출신의 학생들이 대부분이고, 프랑스어 교사 마랭은 매일 이 교실에서 언어를 가르치려 애씁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감각이 밀려옵니다. 마랭이 가르치는 것이 프랑스어인지, 아니면 침묵하는 법인지 모르겠다는 감각이.

로랑 캉테는 이 영화에서 핸드헬드 카메라를 주된 기법으로 사용합니다. 카메라가 흔들리고, 학생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다가 다시 교사 쪽으로 급하게 돌아갑니다. 이 불안정한 미장센(mise-en-scène)이 영화 전체 분위기를 지배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 카메라 앵글, 배우의 위치, 소품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클래스〉의 미장센에는 연출된 질서가 없습니다. 교실이라는 공간이 그 자체로 이미 통제 불가능한 장소임을 화면이 먼저 고백하는 셈입니다.

이 영화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2008년, 많은 비평가들이 주목한 것은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리얼리티'였습니다. 실제로 캉테는 비전문 배우인 실제 학생들을 캐스팅하고, 프랑수아 베고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되 즉흥적인 대사를 대폭 허용했습니다. 그 결과물은 픽션이면서도 다큐멘터리처럼 읽힙니다.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고, 침묵 하나가 선전포고가 됩니다.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언어는 지식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매개체로 작동합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그리고 교실이 공론장이 되지 못하는 이유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민주주의가 제도 이전에 대화로 유지된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말한 공론장(public sphere)이란 어떤 권위도 미리 결론을 정해두지 않은 채 사람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설득하는 공간입니다. 투표나 법률이 민주주의의 형식이라면, 공론장은 그 내용을 채우는 과정입니다.

 

영화 클래스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 이미지

 

 

 

하버마스의 이 개념을 교실에 대입해보면, 〈클래스〉의 비극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영화 속 교실은 표면적으로는 대화처럼 보입니다. 교사는 질문하고 학생은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대화가 어딘가 계속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질문의 권한은 교사에게만 있고, 대답의 형식은 교사가 승인한 언어 안에서만 허용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버마스가 경계한 도구적 이성의 언어입니다. 도구적 이성이란 특정 목적을 위해 언어를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 목적 달성을 위한 언어 조작인 셈입니다.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은 학기말 학생회의입니다. 소우마나라는 학생이 퇴학 위기에 처하고, 교사 마랭은 교직원 회의에서 이 학생의 발언이 문제였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정작 소우마나는 그 회의실에 없습니다.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공간에서 당사자가 배제되는 장면. 이보다 공론장의 실패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버마스가 언급한 이상적 담론 상황(ideal speech situation)의 조건을 여기서 빌려올 수 있습니다. 출처: Jürgen Habermas, 《의사소통 행위 이론》(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 모든 참여자가 발언권을 가질 것
  • 외부 강제 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낼 것
  • 더 좋은 논거가 있으면 기존 입장을 수정할 수 있을 것
  • 어떤 주제도 논의 대상에서 사전에 배제되지 않을 것

〈클래스〉의 교실은 이 네 가지 조건 중 하나도 온전히 충족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마랭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영화가 끝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화의 붕괴는 교실 밖에서도 진행 중이다

〈클래스〉를 보고 나서 자꾸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과 마랭을 나란히 놓으면 무언가 흥미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키팅은 학생들에게 "오, 캡틴, 나의 캡틴"을 외치게 만드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집니다. 그의 교육은 해방을 표방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교사가 중심인 구조입니다. 반면 마랭은 카리스마도 없고, 해방의 언어도 없습니다. 그는 그냥 매일 교실에 나타나 학생들의 말에 반응하려 합니다. 완전히 실패하면서.

〈죽은 시인의 사회〉의 연장선에서 보면, 마랭의 실패는 키팅의 성공보다 오히려 더 현실적입니다. 왜냐하면 교육 현장에는 영감을 주는 교사보다 소진되어가는 교사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백 년을 내다본다는 교육의 문제를 몇 편의 영화나 드라마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학교에 다녔고 누구나 교육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정작 구조를 바꾸는 일 앞에서는 모두가 멈추게 됩니다.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에서 공론장이 붕괴한다고 진단하면서, 미디어와 자본이 대화를 식민화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출처: 씨네21, 〈클래스〉 리뷰 및 로랑 캉테 인터뷰 지금의 학교를 보면 그 식민화가 교실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사는 민원을 두려워하고, 학생은 입시를 향해 달려가고, 대화는 점점 의례적 형식만 남습니다.

알레고리(allegory)로서 〈클래스〉는 학교를 훨씬 넘어섭니다. 알레고리란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가 동시에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담는 서사 기법입니다. 교실이라는 좁은 공간이 민주주의 사회 전체의 축소판이 됩니다. SNS에서 우리는 설득하지 않고 공격하고, 정치는 토론보다 진영 확인을 우선하며,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강화해주는 말만 소비합니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대화의 실패가 낯설지 않은 이유입니다.


〈클래스〉를 보고 나서 오래 남은 질문은 단순합니다. 우리는 지금 말을 주고받고 있는 걸까, 아니면 각자의 방어선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걸까. 하버마스는 더 좋은 논거 앞에서 기꺼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난다고 보았습니다. 교실이든, 국회든, 댓글창이든. 지금 우리에게 그런 공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영화는 묻지 않습니다. 다만 보여줄 뿐입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철학 영화 이야기

 

1️⃣ 《참교육》 × 공자
→ 교육은 왜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잃어버렸을까

2️⃣ 《죽은 시인의 사회》 × 한나 아렌트
→ 학교는 왜 생각하는 인간을 두려워할까

3️⃣ 《다음 소희》 × 푸코
→ 교육은 왜 관리 시스템이 되었는가

 

🔎 생각해볼 질문


학교는 지금 대화보다 통제를 우선하고 있는가?
민주적인 교육은 정말 가능할까?
자유와 질서는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대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기기 위해 말하고 있는가?


참고: https://namu.wiki/w/%ED%81%B4%EB%9E%98%EC%8A%A4(2008%EB%85%84%20%EC%98%81%ED%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