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저는 울 준비를 하고 들어갔습니다. 고문 장면이 나올 거라는 걸 알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진실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었습니다. 그 침묵이 어떤 고문 장면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극장을 나오며 생각했습니다. 저도 지금, 무언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침묵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민주주의란 무엇이었나
영화는 1987년 1월에서 시작합니다. 경찰은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을 내놓습니다. 이 문장은 지금 들어도 기묘한 울림이 있습니다. 단순히 거짓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거짓말이 너무 허술했음에도 한동안 통했다는 사실이, 당시 공론장이 얼마나 깊게 무너져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공론장(public sphere)이란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시민들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공적 사안을 논의할 수 있는 장(場)을 의미합니다. 하버마스는 민주주의가 선거 제도 이전에, 이 공론장의 건강함 위에서 유지된다고 보았습니다. 출처: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1962
장준환 감독의 미장센(mise-en-scène)은 이 무너진 공론장을 공간적으로 구현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카메라 앵글, 조명, 배우의 위치, 소품 등 모든 시각 요소를 가리키는 영화 이론 용어입니다. 영화 초반, 남영동 대공분실 장면들은 철저히 폐쇄적입니다. 창문은 없거나 가려져 있고, 빛은 바깥에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고문의 장소가 아니라, 말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의 알레고리(allegory)로 읽힙니다. 알레고리란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 뒤에 다른 의미 층위가 숨겨져 있는 서사 방식으로, 〈1987〉은 물리적 폐쇄 공간을 통해 당시 한국 사회 전체의 언론 통제와 침묵 강요를 상징적으로 그려냅니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고문을 직접 보여주는 데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카메라는 오히려 그 주변을 맴돕니다. 문 앞에서 소리를 듣는 사람, 보고서를 받아드는 손, 잠시 멈추는 시선. 권력의 폭력보다 그것을 알고도 침묵하는 구조가 더 큰 공포로 기능합니다. 저는 이 연출이 하버마스가 말한 '왜곡된 의사소통'의 시각적 번역이라고 느꼈습니다.
질문 하나가 공론장을 다시 열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요?"
이 한 문장이 영화의 변곡점입니다. 누군가 그 말을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공론장은 균열을 시작합니다. 검사 최환은 부검을 요구하고, 기자 윤상삼은 기사를 쓰려 하고, 교도관은 종이 한 장을 신부에게 건넵니다. 거대한 운동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작은 질문을 멈추지 않은 것입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은 이 장면들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의사소통 행위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상대를 설득하거나 조작하는 것이 아닌, 서로 이해를 향해 열려 있는 대화를 의미합니다. 지위나 권력이 아니라 더 나은 논거가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핵심 주장입니다. 영화 속에서 이 원리가 실현되는 순간은 극적이지 않습니다. 병원 복도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 인쇄소 창고에 숨겨진 문서,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소식. 이 영화가 위대한 웅변이 아니라 소통의 연쇄를 민주화운동의 본질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저에게는 가장 깊이 남았습니다.
여기서 제가 특히 주목한 인물은 연희입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인물이 아닙니다. 삼촌 한병용이 구금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이 흐름에 연루됩니다. 감독은 그녀를 관객의 시점 인물로 배치함으로써, 민주화운동을 이미 의식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현실과 부딪히면서 변해가는 과정으로 그려냅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가 발생하는 것도 이 지점입니다. 카타르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비극적 서사를 통해 관객이 감정적 정화와 해방감을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연희가 마지막으로 거리로 나오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슬픔이기도 하고 어떤 해방이기도 합니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KMDb — 〈1987〉 작품 정보
공론장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6·3 지방선거가 끝나고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관위의 구조적 부실과 책임 소재를 두고 연일 기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기사들 아래에 달린 댓글을 읽다 보면 묘한 기시감이 옵니다. 사람들이 사실을 놓고 다투는 게 아니라 각자의 진영 논리 안에서 이미 내린 결론을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버마스는 이미 1980년대에 공론장이 자본과 미디어 권력에 의해 잠식될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생활세계의 식민화(colonization of the lifeworld)'라고 불렀습니다.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생활의 영역이 화폐와 권력의 논리로 침식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987년의 공론장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닫혔습니다. 2020년대의 공론장은 알고리즘과 자극적 콘텐츠의 논리에 의해 조용히 분열되고 있습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진짜로 대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987〉에서 공론장이 회복되는 과정을 되짚어보면 그 조건이 선명해집니다.
- 서로 다른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품는 것
- 그 질문을 말할 수 있는 통로가 하나씩 열리는 것
- 각자의 자리에서 감수해야 할 위험을 감수하는 것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영웅적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두렵지만 묻는 것, 위험하지만 전하는 것. 하버마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권력이나 이해관계가 아닌 더 나은 논거를 향해 대화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려는 태도. 내 결론을 먼저 정해두지 않고 질문을 시작하는 용기. 〈1987〉은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동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1987〉을 본 뒤 오래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진짜로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말하는 척하고 있는가. 우리가 소비하는 뉴스와 SNS의 의견들이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인지, 아니면 이미 내린 결론을 확인하는 메아리방인지. 그 경계가 어디인지를 스스로 묻지 않는 한, 형식만 남은 민주주의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 약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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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볼 질문
민주주의는 왜 시민의 대화가 멈출 때 흔들릴까?
우리는 서로 토론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영만 소비하고 있는가?
공론장은 왜 점점 분열되기 쉬워졌을까?
SNS 시대의 민주주의는 더 자유로워진 것일까, 더 조작되기 쉬워진 것일까?
참고: https://namu.wiki/w/1987(%EC%98%81%ED%99%94)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17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