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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의 고구마와 아들의 직장 걱정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에픽테토스 "네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하는 한, 너는 노예다." 에픽테토스가 이 말을 했을 때, 그는 로마 제국에서 실제로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텃밭에서 남편 전화를 받던 날 이 문장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텃밭 고구마와 아들 직장 걱정 사이에서, 내가 진짜 살고 있는 삶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2020년 김초희 감독이 연출한 장편 데뷔작입니다. 강말금, 윤여정, 윤승아, 배유람이 주연을 맡았고, 감독 자신의 실직 경험이 깊이 녹아 있습니다.찬실이가 잃은 것, 그리고 남은 것영화 프로듀서 찬실은 어느 날 갑자기 일을 잃습니다. 함께 일하던 감독이 술자리에서 급사하고, 준비 중이던 영화는 엎어집니다. 그녀가 잃은 건 직업만.. 2026. 9. 8.
30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메밀꽃: 《메밀꽃 필 무렵》 × 칸트 × 《천국의 나날들》 넓은 밀밭이 바람에 쓸린다. 카메라는 아무도 쫓아가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다. 테런스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1978)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인물의 대사가 아니라 바로 그 장면입니다. 황금빛 들판이 저녁 빛에 잠기는 그 몇 초 동안, 저는 스크린 앞에서 이상한 질문 하나를 붙들고 있었습니다."아름다움이란 것은, 볼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일까?"그 질문이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봉평의 메밀꽃밭 앞에 섰을 때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달빛 아래 메밀꽃과 맬릭의 들판, 그 풍경이 묻는 것30여 년 전 처음 봉평을 찾았을 때는 솔직히 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이효석 문학관 입구를 서두르던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무엇을 먹일지, 다음 목적지까지 시간이 .. 2026. 9. 7.
다시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 《Stages》 × 찰스 테일러의 진정성 철학 아들과 나란히 공연장 바닥에 서 있던 그 밤이 자꾸 떠오릅니다. 처음엔 서기 싫다며 그냥 가겠다고 했던 아이가, 막상 가수의 표정을 가까이서 보더니 조금씩 몸이 풀렸습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 아이는 지금 음악이 그리운 건지, 아니면 그때의 자기 자신이 그리운 건지. 며칠 뒤 영화 《스테이지》를 혼자 보면서, 그 질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밴드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영화는 벤 가르자가 처음으로 혼자 무대에 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장면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밴드가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름 석 자보다 밴드 이름이 먼저였고, 혼자 틀린 음 하나가 공연 전체를 망치는 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울타리가 사라졌습니다.철.. 2026. 9. 6.
《묻어둔 여름》 × 미셸 푸코: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이라고 말하는가 평일 아침에 극장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날 저를 조금 낯선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나이대의 분들이 보였고, 다들 저처럼 조용히 앉아 스크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극장에 있으면 안 되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그 작은 의문이 영화가 끝난 뒤 훨씬 더 큰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누구의 허락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스캔들이 아니라 시선이 그들을 무너뜨렸다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영화를 먼저 보신 뒤 이 글로 돌아오셔도 좋습니다.1810년, 에든버러의 두 여성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갑니다. 그들이 누군가를 해친 것도, 법을 어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생 하나가 두 사.. 2026. 9. 5.
실업인정 교육을 놓친 날, 나는 새로운 삶의 리듬을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하루》 × 에픽테토스 실업인정 교육을 놓친 날 오후, 저는 차 안에서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고용센터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하루 전체를 흔들어놓았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하루를 잘못 살았다는 것이, 정말 내 삶 전체가 어긋나고 있다는 신호일까요? 홍상수의 《우리의 하루》는 바로 그 질문 앞에 조용히 서 있는 영화입니다.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홍상수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찍었을까《우리의 하루》는 2023년 칸 영화제 감독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된 홍상수의 서른 번째 장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사건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극적인 사건이 없습니다.인물들은 만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 2026. 9. 4.
풀들 사이에서도 부추는 향기를 냈습니다 《미나리》 × 빅터 프랭클 할머니 순자가 개울가에 미나리 씨앗을 뿌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닙니다. 거창한 선언도 없습니다. 그냥 쪼그려 앉아, 손에 쥔 씨앗을 흙과 물 사이에 놓아줍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저 씨앗은 지금 얼마나 많은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할까. 그리고 저는, 지금 어떤 땅에 씨앗을 심고 있을까.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장면의 의미를 천천히 생각해보려 합니다.살아남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 아칸소 주의 낯선 시골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한국계 이민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정이삭 감독이 2021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세상에 알려진 작품입니다.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 2026. 9. 3.
폭염이 지나간 텃밭에서 기후위기를 만났습니다 《2040》 × 폴 W. 테일러 × 알도 레오폴드 우리는 자연을 소유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걸까요. 이 질문이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어쩌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겨온 건지도 모릅니다. 2019년 호주 감독 데이먼 가모가 만든 다큐멘터리 《2040》을 보고 나서, 저는 이 질문을 텃밭에 들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폭염과 폭우 사이에서 뜻밖의 답을 만났습니다.풀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 생명중심주의가 텃밭에서 말을 걸다솔직히 처음엔 그냥 짜증이 났습니다.폭염이 지나간 텃밭에 오랜만에 내려갔더니, 정성껏 키우던 작물들은 말라버린 채였고 그 자리에 잡초만 무릎 높이로 자라 있었습니다. 다시 씨앗을 심고, 친구에게 얻어온 배추 모종에 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폭우가 쏟아졌고, 다시 찾아간 밭에서는 씨앗이 싹.. 2026. 9. 2.
게임을 하는 아들과 영화를 보는 엄마, 그래도 우리는 함께 있었습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 × 마르틴 부버 가족이란 서로를 가장 잘 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어쩌면 우리는 가족을 오래 알았다는 이유로, 정작 지금 이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장 늦게 알아채는 건 아닐까요. 저는 아들과 PC방에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화면을 들여다보던 어느 저녁에, 그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붙잡았습니다.《미스 리틀 선샤인》(2006)은 조나단 데이톤과 발레리 페리스 감독이 만든 가족 로드무비입니다. 영화는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낡은 폭스바겐 승합차 한 대. 그 안에 탄 여섯 명은 각자의 실패와 고집과 침묵을 품고 달립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같은 마음으로 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끝까지 함께 달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이.. 2026. 9. 1.
동창은 NASA에 갔다 왔고, 나는 실업 상태였습니다 《어바웃 슈미트》 × 에픽테토스 퇴직 후 텅 빈 사무실 같은 집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 잭 니콜슨이 연기한 워렌 슈미트는 마지막 퇴근을 마치고 돌아온 첫날 밤,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30년 넘게 일한 보험회사는 아무 문제 없이 그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고, 후임자는 정중하게 그를 돌려보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그 표정을 지은 적이 있다고.오랜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동창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눈에 띄지 않던 친구인데, 지금은 서울의 유명 대학 교수가 되어 NASA까지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 마음은 축하보다 먼저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저는 그날 실업 상태였거든요.직업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걸까워렌 슈미트의 가장 큰 고통은 실직이 아닙니다. 그는 정년.. 2026. 8. 31.
가족도 결국 서로 다른 한 사람을 만나는 관계다《우리들》 × 마르틴 부버 저는 오랫동안 가족이란 주말에는 함께 있어야 완성되는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주말에 남편이 자전거를 타러 나가면 왠지 섭섭했고, 아들이 혼자 게임을 하고 있으면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영화 한 편이 그 생각을 조용히 흔들어 놓았습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은 초등학생들의 이야기인데, 보고 나서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아이들이 아니라 저 자신이었습니다.피구 게임과 가족 안에서 '역할'로 존재하는 것《우리들》에는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체육 시간, 피구 팀을 나누기 위해 아이들이 하나씩 선택받는 장면입니다. 주인공 선은 마지막까지 지목되지 못하다가 어쩔 수 없이 팀에 끼게 됩니다. 팀 안에서도 선은 눈치를 살피며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밟지도 않은 선을 밟았다는 이유로.. 2026. 8. 30.
남편은 자전거를 타고, 아들은 게임을 하고, 나는 캠핑을 갔습니다 《김씨 표류기》 × 장자 이번 주말, 저는 계곡 캠핑장에 있었고 아들은 PC방에 있었고 남편은 자전거 도로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한 가족이 같은 날 전혀 다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 셈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이 상황 자체를 못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가족이 함께해야 가족답다는 생각,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주말이었습니다.소요유(逍遙遊)가 말하는 것: 각자의 리듬을 인정하는 법장자 철학에서 소요유(逍遙遊)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소요유란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본성에 맞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억지로 같은 모양에 끼워 맞추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고통이 커진다는 것이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저는 꽤 오래 이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주말마다 아들과 .. 2026. 8. 29.
내가 정착할 곳과 아들이 선택할 길 《죽은 시인의 사회》 × 에리히 프롬 솔직히 말하면, 저는 오늘 워크숍에서 꽤 많이 흔들렸습니다. 농촌에 정착하겠다고 준비하면서도 막상 오래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 앉으니 제가 얼마나 겉돌고 있는지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는 진짜 농촌에 정착할 거야?"라고 물었는데, 그 한 마디가 오히려 제 질문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도, 아들도, 결국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워크숍이 드러낸 것, 정착의 민낯제가 참석한 자리는 도농순환 주민공모사업 워크숍이었습니다. 도농순환이란 도시와 농촌 사이를 오가며 자원과 사람이 상호 교류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단순히 농촌에 집을 얻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역 사람들이 함께 문제를 발굴하고 사업을 구상하는 구조입니다. 저는 지인의 요청으로 참석했는데, 솔직히 처음.. 2026.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