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08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를 희생해야 할까《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에리히 프롬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이, 나를 지워가는 것과 같은 말일까요? 광복절 연휴에 남편과 시어머니 댁에 다녀오는 길에 저는 이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어두워질 때까지 밭에서 비료를 뿌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잡초를 뽑으러 나갔지만 하필 비가 내렸습니다. 결국 시어머니의 표정은 끝내 풀리지 않은 것 같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는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떠올렸습니다. 민규동 감독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었습니다.어머니의 손이 멈추는 장면에서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영화 속 어머니는 쉬지 않습니다. 밥을 하고, 빨래를 걷고, 남편의 잔소리를 흘려듣고, 자녀들의 일에 마음을 쓰면서 하루를 마칩니다. 카메라는 그 반복되는 손을 자주 보여줍니다. 아무 설명 없이,.. 2026. 8. 16. 결과를 알 수 없어도 행동할 이유가 있는가 《하얼빈》 × 알베르 카뮈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행동했다." 이 한 마디를 들었을 때, 저는 잠시 멍했습니다. 결과를 확신하지 못한 채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 남긴 말치고는 너무 담담했기 때문입니다. 《하얼빈》은 그 담담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2026년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영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다루고 있으므로,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결과를 모르면서도 움직이는 사람들광복절을 앞둔 지난주, 저는 지인과 함께 지역 영상센터에서 《영웅》을 다시 봤습니다. 이미 한 번 본 영화였는데도 이번엔 유독 조마리아 여사의 장면에서 손을 꼭 쥐었습니다. 아들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어머니는 수의를 준비합니다. 살려달라고 빌지 않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저.. 2026. 8. 15. 가족을 돌보는 삶과 나 자신으로 사는 삶은 반드시 반대일까《오케이 마담2》 × 시몬 드 보부아르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저를 기다리고 있던 건 화려한 엔딩 크레딧이 아니었습니다. 쌓인 설거지와 남편의 짐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안에서 뭔가 작게 꺼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관 안에서는 분명히 살아 있는 기분이었는데, 집 문을 여는 순간 그 감각이 흐릿해졌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피로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저는 그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내재성(immanence)과 초월(transcendence)이라는 개념이 그때 불쑥 떠올랐습니다.영화관 안의 나와 집 안의 나는 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까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장면은 조심스럽게 넘어가겠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장면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오케이 마담2》에는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 예상치 못.. 2026. 8. 14. 인생의 목적지를 지나, 이제는 하루를 살아갑니다 《어바웃 타임》 ×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평범한 삶의 행복 시간여행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결국 선택한 것은 완벽한 하루가 아니라 평범한 하루를 다르게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이 단순한 로맨스 영화로 끝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흘려봤는데, 실직 이후 집으로 가는 어느 기차 안에서 이 영화가 불현듯 다시 떠올랐습니다.에피쿠로스가 말한 행복, 욕망이 아닌 아타락시아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실제로 강조한 것은 전혀 달랐습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ataraxia)를 행복의 핵심 조건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아타락시아란 불필요한 불안과 동요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평온 상태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무언가를 더 갖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에서 불안을 걷.. 2026. 8. 13. 광복절에 다시 본 《영웅》과 칸트 의무윤리: 안중근과 조마리아를 통해 생각해보는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독립 아들에게 "알아서 저녁 먹어"라고 말해놓고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마트로 향했습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지역 영상센터에서 무료 상영된 《영웅》을 다시 보고 난 직후였습니다.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의 수의를 손수 짓는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제가, 결국 아들 먹을거리를 사러 간 것입니다. 이 간극이 오히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핵심이었습니다.조마리아의 선택, 칸트 의무윤리로 읽다영화 《영웅》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들었던 장면은 안중근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앞두고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조마리아 여사.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그저 위대한 모성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면서 칸트 의무윤리(Kantian Deontological Ethics)가 떠올랐습니다. 칸트 의.. 2026. 8. 13. 이제는 나에게로 돌아갈 시간 《오디세이》와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인생 후반의 귀환 실업신고를 마치고 나서 지인과 꿈에 그리던 예쁜 카페에 앉아 있는데, 이상하게 커피가 입에 들어가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었는데 그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멍했습니다. 실직이 단순히 월급이 끊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 카페에서 처음 실감했습니다. 이 글은 그 이후 제가 겪은 일들과, 영화 한 편이 불안했던 저에게 던져준 질문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몸이 먼저 멈추라고 신호를 보냈습니다실업신고 다음 날,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를 혼자 관람했습니다. 영화관에서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어지럼증이 왔고, 눈이 떨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손발도 저렸습니다.사실 그 증상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눈의 떨림은 이미 2주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2026. 8. 12. 실망했는데 왜 후련했을까? 《드라이브 마이 카》와 붓다가 말하는 ‘놓아줌’의 의미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결과 자체보다 더 힘들 때가 있습니다. 될까 안 될까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이 오가고, 그 반복이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불교 철학에서는 이걸 고(苦, dukkha)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고(苦)란 단순히 큰 불행이나 고통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붙잡으려는 집착 자체에서 비롯되는 크고 작은 모든 불편함을 가리킵니다. 붓다가 말한 괴로움의 근원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마음을 묶어두는 방식에 있다는 겁니다.기다리는 마음이 괴로움을 키운다불합격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는 쓸모없는 사람인가", "이제 기회가 없는 것 아닐까" 같은 생각이 붙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건 하나가 자신의 가치 전체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둔갑하는.. 2026. 8. 11.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열심히’가 아닐지도 모른다 《퍼펙트 데이즈》와 장자가 말하는 내려놓음의 자유 통계조사 계약이 끝나고 두 번째 맞이하는 월요일, 지난주에 미세먼지감시원 채용 불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지난해부터 8개월을 일했고 당연히 다시 될 거라고 기대했던 터라 실망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자 마음 한구석이 오히려 편해지는 겁니다. 불합격인데 왜 후련한 걸까,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영화 한 편과 오래된 철학 한 권이 떠올랐습니다.불합격 통보를 받은 날, 왜 마음이 편해졌을까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불합격 문자를 확인하고 잠깐 허탈했는데, 오후가 되자 이상하게 어깨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는 고용센터에 구직급여를 신청하러 갔다가 지인을 만나 예쁜 카페에 들렀고, 붐비지 않는 시간에 마트에서 장을 봤습니다. 출근했더라면 절대 누릴 수 없.. 2026. 8. 10. 불합격했는데, 왜 마음 한쪽이 편해졌을까《인생은 아름다워》와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 수용소 안, 귀도는 아들의 눈을 피해 총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과장된 발걸음으로 걷습니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병사 흉내를 내듯이. 조슈아가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귀도는 끝까지 웃음을 연기합니다. 그 장면 앞에서 저는 한참 멈췄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해보려 합니다.그런데 저는 그날 유독 그 장면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미세먼지 감시원 채용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은 직후였거든요. 8개월 동안 일했던 자리였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탈락이었습니다.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자 실망 아래에서 뭔가 후련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그게 뭔지 몰라서 영화를 다시 켰고, 귀도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에피쿠로스(Epicurus)가 떠.. 2026. 8. 9. 인간은 자연의 주인인가, 일부인가《프린세스 모노노케》로 읽는 노자의 자연철학 숲의 신 모로가 산을 등에 태우고 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람을 가르는 흰 늑대의 발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 저는 리모컨을 내려놓았습니다. 1997년에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웅장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면서는 달랐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멈춰,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원래부터 인간 바깥에 있던 것인가." 마침 며칠 전 미세먼지 점검원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다시 쓰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지원동기 칸을 채우면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는 걸,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노자가 경고한 것과 에보시가 선택한 것타타라 마을의 대장장이 에보시는 나쁜 사.. 2026. 8. 8. 환경을 지키는 것은 인간만을 위한 일일까 《월-E》로 읽는 아르네 네스의 심층생태학 마트 장바구니에 담긴 일회용 용기를 꺼내다가 문득 멈췄습니다. 오늘만 몇 개째인지 세어보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월-E》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쓰레기 더미 위에 홀로 남겨진 작은 로봇이, 아무도 보지 않는 지구에서 묵묵히 쓰레기를 압축하는 장면. 그 모습이 왜인지 낯설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지만, 정작 '왜'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미래 세대를 위해서? 그 대답 너머에 아르네 네스(Arne Næss)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화분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고 가는 로봇의 손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영화 초반, 월-E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홀로 일합니다. 감독 앤드루 스탠턴은 대사 없이 오직 화.. 2026. 8. 7. 우리는 왜 진실을 보면서도 외면하는가 《돈 룩 업》 × 하이데거 두 과학자가 대통령 집무실에서 허둥지둥 설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혜성이 온다고, 몇 달 안에 지구와 충돌한다고, 확률이 아니라 확정이라고. 그런데 대통령은 선거 일정을 꺼내 듭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웃겨야 하는데 웃기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뉴스 속에서, 혹은 제 일상에서.이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우리는 왜 진실을 보면서도 외면하는가영화 《돈 룩 업》은 2021년 애덤 맥케이 감독이 연출했습니다. 혜성 충돌이라는 설정은 사실 기후위기의 메타포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기후위기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왜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걸까, 라는 질문입니다.솔직히 처음.. 2026. 8. 6. 이전 1 2 3 4 5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