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우리는 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가
계급 갈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욕망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직장 동료들과의 저녁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왜 그렇게 무겁던지요. 누군가는 수도권 아파트를 여러 채 가지고 있다 하고, 누군가는 자녀가 의사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조용히 작아지곤 했습니다. 그때 느꼈던 그 감정의 정체를 뒤늦게 철학에서 찾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계급구조는 단순히 돈 차이가 아니다
영화 기생충에는 두 가족이 등장합니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과 대저택에 사는 박 사장 가족. 표면적으로는 재산의 차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한 구조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사회를 계급구조(class structure)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계급구조란 단순히 소득 수준으로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을 누가 소유하고 누가 그것에 의존하며 살아가는가를 기준으로 사회가 나뉜다는 개념입니다. 기택 가족은 생존 자체를 박 사장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각자 분리된 공간에 살고 있지만, 경제적 종속 관계는 명확합니다. 이러한 계급 구조는 설국열차에서도 극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제가 직장에 다니던 시절을 돌이켜 봐도 비슷한 구조를 느꼈습니다. 조직 안에서 누가 결정권을 쥐고 있는지, 누가 그 결정에 따라야 하는지. 그 관계는 연봉 명세서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삶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소득 불평등 수준을 나타내는 지니계수(Gini Coefficient)는 꾸준히 0.3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니계수란 소득 분배의 불평등 정도를 0과 1 사이의 숫자로 표현한 지표로, 숫자가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의미입니다. 수치만 보면 크게 나빠 보이지 않지만, 자산 불평등까지 포함하면 체감 격차는 훨씬 크게 벌어집니다(출처: 통계청).
모방욕망이 만들어낸 선택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은 스스로 욕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모방욕망(mimetic desire)이란, 내가 무언가를 원하게 되는 것이 순수한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원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기생충에서 기택 가족이 진짜 원하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닙니다. 박 사장 가족의 생활 방식, 그 여유로움, 그 집이 주는 공기 같은 것들입니다. 욕망의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타인의 삶 전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이러한 모방 욕망은 조커에서 사회적 박탈감으로 변형됩니다.

솔직히 이건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동료가 오피스텔로 수익을 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대출을 받아 따라 샀습니다. 그게 제 상황에 맞는 선택인지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은 채로요. 결국 손해를 보고 처분했습니다. 자녀 유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 없는 돈에 보냈지만, 아이는 중도에 돌아왔고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됐습니다. 뒤늦게 지라르의 이론을 접했을 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 욕망이 정말 내 것이었나?" 하는 물음이 남았습니다.
지라르의 모방욕망 이론은 사회심리학의 사회비교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사회비교이론이란 인간이 자신을 평가할 때 절대적 기준이 아닌 주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려는 심리적 경향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상대적박탈감은 왜 점점 더 커지는가
비교 자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행동입니다. 문제는 그 비교가 만들어내는 감정입니다. 상대적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이란, 절대적 빈곤과 무관하게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심리 상태입니다.
예전보다 먹고 살기 좋아진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더 힘든 것 같을까요. 이것이 바로 상대적박탈감의 역설입니다. 절대적 수준이 올라갈수록 비교 기준도 함께 올라가기 때문에 만족감은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줄어듭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고 믿는 현실이 완전히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매트릭스에서도 드러납니다.
퇴직 후에도 이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SNS에 해외여행 사진을 올리는 동안, 저는 민간점검원으로 현장을 뛰다 사고까지 겪었습니다.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묵직해지는 이유를 한동안 몰랐습니다. 내 삶이 나쁜 게 아닌데도 자꾸 남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교 심리가 고통을 만드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 비교는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낸다. 같은 조건도 누구와 비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 기준은 항상 위를 향한다. 어느 수준에 도달해도 더 높은 비교 대상이 등장하기 때문에 만족의 끝이 없습니다.
- 욕망의 출처가 외부에 있으면 충족이 불가능하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얻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구조와 개인의 선택 사이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에 따른 부의 분배는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저도 그 부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서 나타나는 양극화(polarization)입니다. 양극화란 중간층이 줄어들고 상위와 하위가 극단으로 벌어지는 현상으로, 단순히 격차가 커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격차가 클수록 모방욕망의 대상도 더 멀어지고, 그만큼 박탈감도 깊어집니다.
제 경험상 이건 개인의 의지 문제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구조가 만들어낸 압력 속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지키려면 굉장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결국 모임을 끊고 귀농귀촌을 선택해 지방으로 내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도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솔직히 지금도 가끔 패배감 같은 것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묻게 됩니다. 이게 내 감정인가, 아니면 내가 오랫동안 내면화한 타인의 기준에서 오는 것인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소외(alienation) 개념도 이 맥락과 이어집니다. 소외란 마르크스가 말한 개념으로, 인간이 자신의 노동이나 삶에서 분리되어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끊임없이 타인의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현대적 의미의 소외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라르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한 이후부터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타인의 삶이 좋아 보일 때, "저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건지"를 한 번 더 묻게 됩니다. 그 질문 하나가 충동적인 선택을 꽤 많이 막아줬습니다.
결국 비교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상 비교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비교가 타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그 경계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귀농귀촌이 정답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그 욕망이 어디서 왔는지를 직시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생충이 던지는 질문이 결국 그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정말 당신의 것입니까."
🤔 생각해볼 질문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나의 욕망인가, 타인의 욕망인가?
비교하지 않는 삶은 가능한가?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