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Into the Wild》는 귀농과 자립, 자유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연 속에서 단순하게 살아갈 때 인간은 본래의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귀농은 단순히 시골로 이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되는 선택이다.
진정한 자유는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한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통장 잔고 전부를 기부하고, 자동차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화염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홀가분해 보였거든요. 그 순간 제가 느낀 건 부러움이었는지, 두려움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귀농귀촌을 두고 갈팡질팡하는 제 처지에서 다시 꺼내 보니, 이 영화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Into the Wild》는 자유, 자립, 그리고 삶의 선택에 대한 질문을 가장 날것의 언어로 던지는 작품입니다. 영화의 결말을 이미 아시는 분들과 함께, 그 질문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소로는 숲으로 갔고, 크리스토퍼도 숲으로 갔다
소로는 말했습니다. "나는 신중하게 살고 싶었다. 삶의 핵심만을 마주하고 싶었다."(출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이 문장이 《Into the Wild》 전체를 관통합니다.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는 1992년, 명문대를 갓 졸업한 스물두 살의 나이에 알래스카 황야로 홀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숀 펜 감독이 2007년에 완성한 이 영화는 그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으면 닮은 점이 많습니다. 소로는 1845년 월든 호숫가에 손수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을 살았습니다. 크리스토퍼는 버려진 버스를 집 삼아 알래스카의 혹독한 자연 속에서 버텼습니다. 둘 다 소유를 줄였고, 속도를 늦췄으며, 불편함을 감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차이가 보입니다. 소로는 사회와의 연결을 완전히 끊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말이면 마을에 나가 가족을 만났고, 친구들의 방문도 허락했습니다. 반면 크리스토퍼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이 차이가 단순한 선택의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이것이 자연주의(Naturalism)와 금욕주의(Asceticism)의 경계선이라고 읽힙니다. 자연주의란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금욕주의란 욕망과 쾌락을 철저히 절제함으로써 정신적 자유를 얻으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크리스토퍼의 선택은 자연주의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금욕주의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소로와 크리스토퍼, 그 둘이 공유한 것은 이 한 가지입니다. 더 적게 가질수록 더 선명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 저는 이 믿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몸이 말을 듣지 않는 현실을 압니다. 주말마다 귀농인의 밭에 나가 풀을 뽑고 물을 주다가 차에 올라타는 순간, 저는 늘 멍하니 앉아 있게 됩니다. 몸은 지쳐 있는데 마음은 아직 거기 남아 있는 것처럼요.
시민 불복종, 그리고 '남이 만든 삶'을 거부하는 용기
소로는 『시민 불복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다수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내 양심이 명령하기 때문에 나는 그 길을 간다."(출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시민 불복종』)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란, 사회의 법이나 관습이 개인의 양심에 반할 때 이에 평화적으로 저항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소로는 이것을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자기 기준으로 사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봤습니다.

크리스토퍼의 행동은 그 자체로 조용한 불복종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해치거나 구호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공 공식'이라 불리는 것, 즉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안정된 미래라는 사회적 경로를 조용히 걸어 나왔습니다.
이 지점에서 동양 철학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결이 느껴집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무위(無爲)를 말했습니다. 무위란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태도입니다. 소로의 '단순한 삶'과 노자의 '무위'는 언어는 다르지만 방향이 같습니다. 더 많이 쌓으려 애쓰는 대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것. 그것이 오히려 자유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
그렇다면 크리스토퍼의 선택은 어디에 놓일까요. 저는 그것이 실존적 결단(Existential Decision)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실존적 결단이란 자신의 존재 방식을 외부의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 정의하고 선택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철학자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정해진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면서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귀농을 고민하는 분들이라면 이 질문 앞에서 한 번쯤 멈추게 됩니다.
- 지금 내 삶의 방향은 내가 고른 것인가, 아니면 주변이 만들어 놓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 귀농을 꿈꾸는 것이 진짜 나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도시 생활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인가?
-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자연 속 여유'라는 이미지를 원하는 것인가?
저도 이 질문들 앞에서 솔직히 말하면 아직 대답을 못 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싱그럽고, 가까이서 보면 웬수인 것들에 대하여
영화에서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씁니다. "행복은 나눌 때만 진짜가 된다." 알래스카에서 홀로 지내던 그가 마지막에 이른 문장입니다. 저는 이 대사가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를 찾아 떠난 사람이 결국 발견한 것이 '관계'라는 사실, 그것이 이 영화를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철학적 고백으로 만드는 이유입니다.
저는 주말마다 귀농인의 밭에 나갑니다. 오고 가는 길의 풍경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 논둑 사이로 우거진 초록. 그런데 밭에 앉아 작물 옆에 자란 풀을 뽑기 시작하면, 그 풀이 마치 저를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멀리서 보는 풀은 싱그럽지만 제 밭에서 자라는 풀은 웬수입니다. 이 말이 웃기지만, 귀농을 3년 가까이 준비하며 배운 가장 솔직한 진실입니다.
소로는 월든에서 2년을 살고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경험에서 배운 것을 글로 남겼고, 그 글이 백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읽힙니다. 크리스토퍼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제가 단정 짓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 그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귀농이 도피인지 새로운 시작인지, 이 질문에 저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장소를 바꾸는 것이 삶을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혼자 버티는 것이 자립이 아니라는 것. 자유는 고집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솔직한 선택에서 시작된다는 것.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니라,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는 데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 질문을 이 영화가 다시 한 번 제 앞에 조용히 놓아두었습니다. 당신에게도 그 질문이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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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볼 질문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기대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자유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가, 아니면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는 데서 오는가?
귀농과 귀촌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삶의 철학을 바꾸는 선택이 될 수 있을까?
참고: https://namu.wiki/w/%EC%9D%B8%ED%88%AC%20%EB%8D%94%20%EC%99%80%EC%9D%BC%EB%93%9C
https://www.gutenberg.org/ebooks/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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