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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31

일자리를 내려놓으니 비로소 삶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키루》 살다× 빅터 프랭클 통계조사 지원업무 계약 만료 후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갈 곳이 없었던 날이 종종 있었습니다. 알람을 끄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늘 하루를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을 잃은 것도, 아픈 것도 아닌데, 그냥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1952)를 다시 꺼내 든 건 바로 그 즈음이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여운을 천천히 들여다보려는 사색의 기록입니다.삶의 무게를 처음 느낀 순간, 와타나베처럼와타나베는 30년 넘게 관공서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해온 공무원입니다. 그는 성실했지만, 어느 날 자신이 살아 있다는 실감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위암 선고를 받습니다.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 2026. 8. 21.
가족을 위해 살다 보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바튼 핑크》 × 실존주의 호텔 방 벽지가 천천히 부풀어 오릅니다. 뜨거운 습기에 풀이 녹아 벽에서 종이가 떨어지고, 바튼 핑크는 타자기 앞에 앉아 있습니다. 아무것도 써지지 않습니다. 그는 위대한 서민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옆방 서민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타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작가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역할에 지쳐버린 누군가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호텔방이라는 이름의 역할 감옥1991년 코엔 형제가 연출한 《바튼 핑크》는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극작가가 할리우드로 건너가 창작의 벽에 부딪히는 이야기입니다. 무대는 거의 한 곳, 얼스 호텔 621호실입니다.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불쾌할 만큼 답답하고, 이야기는 어.. 2026. 8. 17.
가족을 돌보는 삶과 나 자신으로 사는 삶은 반드시 반대일까《오케이 마담2》 × 시몬 드 보부아르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저를 기다리고 있던 건 화려한 엔딩 크레딧이 아니었습니다. 쌓인 설거지와 남편의 짐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안에서 뭔가 작게 꺼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관 안에서는 분명히 살아 있는 기분이었는데, 집 문을 여는 순간 그 감각이 흐릿해졌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피로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저는 그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내재성(immanence)과 초월(transcendence)이라는 개념이 그때 불쑥 떠올랐습니다.영화관 안의 나와 집 안의 나는 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까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장면은 조심스럽게 넘어가겠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장면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오케이 마담2》에는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 예상치 못.. 2026. 8. 14.
블랙 스완 (Black Swan) x 키에르케고르: 완벽을 향한 집착과 자아의 분열 오늘 계약이 끝났습니다. 짐을 챙겨 나오면서 저는 이상하게도 니나 생각을 했습니다. 발레리나 니나. 완벽한 백조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그 여자. 퇴직 후 3년째, 몇 달짜리 계약직을 전전하면서 제가 느끼는 이 허전함이 꼭 그녀의 표정과 닮아 있었습니다. 뭔가를 열심히 했는데,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은 그 느낌. 《블랙 스완》을 다시 떠올린 건 그날 저녁이었습니다.무너지는 것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것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결말보다는 그 과정, 니나의 내면이 어떻게 갈라지는가를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2010년 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발레라는 장르를 선택했습니다. 발레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 2026. 8. 1.
영화 《마인드스케이프》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불안: 불안은 자유의 징표 불안은 피해야 할 감정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일까요?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의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필연적 감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저도 첫째 아이의 결혼 소식을 들었던 날, 기쁨보다 막막함이 먼저였습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실존적 불안 —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자유의 징표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불안의 개념》(1844)에서 실존적 불안(Existential Anxiety)이라는 개념을 처음 체계적으로 다뤘습니다. 여기서 실존적 불안이란 단순히 어떤 대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 그 자체에서 생겨나는 어지러움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나는 이 길도 갈 수 있고 저 길도 갈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이 불안의 뿌리라는 것입.. 2026. 7. 19.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와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좌절은 끝이 아니라 비약의 시작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한계상황을 그냥 '불운'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의 죽음도, 반복되는 경제적 어려움도,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 문제도 전부 그냥 재수 없는 일 정도로 치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다시 떠올리면서 야스퍼스의 철학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제가 살아온 방식이 조금 다르게 읽혔습니다.아버지 덕분에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제 아버지는 생전에 극장 포스터를 붙이는 일을 하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엔 그게 얼마나 특별한 경험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냥 아버지 따라 극장 구석에 앉아 화면을 멍하니 보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옛날 영화들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요즘도 좋은.. 2026. 7. 17.
취업이라는 짐, 그 무거운 자유의 무게: 《어른이 되면》으로 보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솔직히 저는 아들이 정규직 근로 계약서에 싸인을 하던 날, 제 짐도 함께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3개월 수습을 버텨내고 이제 스스로 서는구나 싶었는데, 바로 그 직후에 들려온 말이 "출근하기 싫다"였습니다. 한국 독립영화 《어른이 되면》이 그리는 미취업 청년의 불안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저는 그때 몸으로 확인했습니다.실존주의가 말하는 취업 불안의 정체일반적으로 취업에 성공하면 불안이 사라진다고들 합니다. 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월세 집도 얻고 제가 쓰던 차도 넘겨받았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직장 다니기 싫다"는 말이 나왔을 때, 저는 불안이 취업 전후를 가리지 않는다는 걸 실감했습니다.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 2026. 7. 14.
영화 <와일드 씽>과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가 주는 인생 2막의 위로 퇴직 후 3년째 지방에 내려와 텃밭과 일자리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귀농귀촌이 이렇게 막막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던 중 전직 동료들과 함께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손재곤 감독의 이었는데, 20년 만에 다시 무대를 꿈꾸는 중장년 댄서들의 이야기가 가슴 어딘가를 세게 건드렸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머릿속에 맴돈 건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영화가 건드린 것: "넌 이미 끝났어"라는 말에 저항하기영화 의 주인공들은 세기말 혼성 댄스 그룹 '트라이앵글' 출신입니다. 표절 논란으로 강제 해체된 뒤 20년이 지났고, 각자는 생계형 방송 리포터, 빚더미 위의 솔로, 재벌가 며느리라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 2026. 7. 9.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영화 《Into the Wild》로 보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자연 철학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Into the Wild》는 귀농과 자립, 자유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영화이다.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연 속에서 단순하게 살아갈 때 인간은 본래의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귀농은 단순히 시골로 이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되는 선택이다.진정한 자유는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데서 시작된다.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한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통장 잔고 전부를 기부하고, 자동차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화염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홀가분해 보였거든요. 그 순간 제가 느낀 건 부러움이었는지, 두려움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귀농귀촌을 두고 갈팡질팡하는 제 처지에서 다시 꺼내 보니, .. 2026. 6. 28.
〈행복을 찾아서〉 빅터프랭클— 행복은 쫓는 것인가, 따라오는 것인가 지하철 화장실 문을 안에서 잠그고, 아들이 잠든 사이 혼자 울음을 삼키는 장면이 있습니다. 〈행복을 찾아서〉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잡혀 있었던 장면입니다. 화면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사람이 거기 있습니다.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저도 압니다. 저 사람은 내일 아침에 일어날 거라는 걸. 그 확신이 어디서 오는지,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계속 생각했습니다.이 영화가 묻는 것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입니다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는 똑똑합니다. 부지런합니다. 포기도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사람의 능력보다 그 능력을 작동시키는 연료에 더 오래 카메라를 들이댑니다.무허가 판매원으로 뛰어다니면서도, 노숙자 쉼터 앞에 줄을 서면서도, 그의 눈은 항상 뭔가를 향해 있습니다. 아들 크.. 2026. 6. 21.
〈미키 17〉 과 니체의 영원회귀 — 죽어도 살아야 한다면, 삶은 의미 있는가 ✔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영화 《미키 17》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니체의 영원회귀와 초인 사상죽음은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가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실패와 재도전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미키는 또 죽는다. 방호복도 없이 행성의 독성 지형 속으로 밀어 넣어지고, 그 몸은 산산이 부서지거나 녹아 없어진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는 다시 깨어난다. 기억을 품은 채, 죽기 직전의 공포를 고스란히 기억한 채로. 〈미키 17〉이 불편한 이유는 화면이 잔인해서가 아닙니다. 죽음이 그토록 가볍게 소비되는 세계에서,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관객에게 너무 익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죽음이 리셋되는 세계, 그래서 오히려 더 잔인한 이야기봉준호 감독은 장르의 문법을 빌려 철학적 질문을 숨겨두.. 2026. 6. 20.
〈Her〉 그녀와 하이데거 — 완벽한 관계가 인간을 외롭게 한다 ✔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AI 시대에 왜 인간의 외로움이 더 커질 수 있는가영화 《Her》가 지금 다시 주목받는 이유하이데거가 말한 기술의 본질은 무엇인가AI와 반도체 경쟁이 우리 삶에 던지는 질문기술 발전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키는 방법 편안할수록 우리는 더 고독해진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Her〉를 보고 나면 이 문장이 역설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스파이크 존즈가 2013년에 내놓은 이 영화는 AI와의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찰 없는 관계가 인간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짚어낸 사람이 스크린이 아니라 20세기 독일의 한 철학자였다는 사실이 저를 계속 이 영화로 돌아오게 합니다.마찰 없는 세계, 혹은 불편함이 사라진 .. 2026.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