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전》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이상하게도 분노보다 멍함이 먼저 왔습니다. 총격전도, 전우의 죽음도 아니라 "곧 휴전인데 왜 아직도 싸우는 거죠?"라는 병사의 한 마디가 가슴에 걸렸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전쟁 서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습니다. 카뮈가 이 영화를 봤다면, 그는 아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맞다. 저게 바로 부조리다."
감독이 숨긴 철학적 코드: 끝나지 않는 산, 반복되는 죽음
장훈 감독은 애록고지를 단순한 전략적 요충지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 고지는 빼앗기면 다시 빼앗고, 탈환하면 또 빼앗기는 공간입니다. 승패는 없고 반복만 있습니다. 이 구조를 처음 의식했을 때, 솔직히 이 부분에서 멈칫했습니다. 이건 전쟁 영화의 미장센(mise-en-scène)이 아니라 철학적 알레고리였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가 하나의 의미를 향해 수렴하는 방식을 뜻하는데, 이 영화에서 고지의 반복적 탈환 구조는 그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카뮈의 부조리(Absurd)가 정확히 여기에 맞닿습니다. 부조리란 인간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욕망과, 세상이 그 욕망에 끝내 침묵으로 답하는 것 사이의 충돌입니다. 병사들은 묻습니다. 왜 싸우는가. 왜 여기서 죽어야 하는가. 하지만 전쟁은 답하지 않습니다. 명령만 내려올 뿐입니다. 카뮈는 이 침묵을 "세계의 비이성성"이라 불렀고,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평생 탐구했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영화의 내러티브(narrative) 구조도 이 부조리를 강화합니다. 주인공 은표는 전쟁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으로 시작하지만, 고지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질문 자체를 잃어갑니다. 살아남는 것만 남는 그 무표정이, 카뮈가 말한 부조리를 체화한 인간의 얼굴입니다.
동양 사상으로 읽기: 노자는 이 전쟁을 어떻게 봤을까
카뮈가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면, 노자는 아마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왜 그 고지를 차지하려 하는가?"
노자의 무위(無爲) 사상이 이 영화와 강하게 겹쳐집니다. 무위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인위적 욕망을 내려놓고, 자연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도덕경》 8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처럼 낮은 곳에 있다는 구절은, 고지의 정상을 차지하려는 전쟁의 논리와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영화 속 가장 기이한 장면 중 하나는 밤이 되면 남북 병사들이 같은 고지 안에 술과 편지를 남겨두고 나눠 갖는 장면입니다. 낮에는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눴던 사람들이 밤에는 언어를 나눕니다. 제 해석으로는, 이 장면이 무위의 순간입니다. 국가의 명령, 이념의 논리, 전쟁의 문법이 일시적으로 멈추고 그 자리에 그냥 "인간"이 남는 것입니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으로도 이 장면은 읽힙니다. 연기론이란 모든 현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의 조건이 되어 발생한다는 사유입니다. 적과 아군은 서로를 전제로 존재합니다. 적이 없으면 아군도 없습니다. 그 두 존재가 밤에 편지를 나누는 행위는, 적대 관계의 구조 자체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드러냅니다. 이념이 사라지면 거기엔 그냥 피로하고 두려운 사람들만 남습니다.
동양 철학의 시선에서 이 전쟁은 인위(人爲), 즉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고지를 차지하려는 집착은 도교적 의미에서 집착 자체가 고통의 원천이라는 불교의 고(苦)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서양 사상으로 읽기, 그리고 두 시선이 만나는 지점
다시 카뮈로 돌아오면, 그의 답은 노자와 미묘하게 다릅니다. 카뮈는 흐름에 맡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조리를 인식하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반항(Revolt)을 말했습니다. 반항이란 의미 없는 세계에 굴복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며 오늘을 살아내는 태도입니다.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인간으로 상상하라고 말합니다(출처: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민음사). 애록고지를 반복적으로 오르는 병사들의 모습은, 시지프의 현대적 변주입니다. 그들은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오릅니다. 그 오름 자체가 존재의 방식입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와도 연결됩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 이후에 스스로 의미와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사상입니다. 병사들은 국가가 부여한 임무 안에서 태어났지만, 그 안에서도 선택을 합니다. 편지를 건넬 것인가 말 것인가. 동료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 선택들이 쌓여 인간다움이 됩니다.
동양과 서양의 두 시선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노자는 욕망과 인위를 내려놓으라 했고, 카뮈는 부조리에 맞서 살아가라 했습니다. 방향은 달라 보이지만, 두 사상 모두 하나를 향합니다. 거대한 구조 앞에서도 인간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시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카뮈(서양): 세계는 의미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반항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태도 자체가 존엄이다.
- 노자(동양): 의미를 억지로 찾으려는 욕망 자체를 내려놓아라.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인간다움이 회복된다.
- 교차점: 이념과 명령이 사라진 밤, 편지를 나누는 그 순간. 두 사상 모두 그 장면을 진짜 인간의 자리라고 부를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저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병사들이 끝내 서로를 향해 총을 쏘아야 했던 마지막 장면이, 카뮈의 부조리이자 노자가 경고했던 인위의 비극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충일에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그날 죽은 사람들을 단순히 숫자로 기억하지 않게 됩니다. 그들도 밤에는 편지를 쓰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야말로, 어쩌면 철학이 전쟁을 바라보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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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은 왜 살아가려 하는가?
참고: https://namu.wiki/w/%EA%B3%A0%EC%A7%80%EC%A0%84(%EC%98%81%ED%99%9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camus/
https://www.minums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