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3년째 지방에 내려와 텃밭과 일자리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귀농귀촌이 이렇게 막막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던 중 전직 동료들과 함께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손재곤 감독의 <와일드 씽>이었는데, 20년 만에 다시 무대를 꿈꾸는 중장년 댄서들의 이야기가 가슴 어딘가를 세게 건드렸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머릿속에 맴돈 건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영화가 건드린 것: "넌 이미 끝났어"라는 말에 저항하기
영화 <와일드 씽>의 주인공들은 세기말 혼성 댄스 그룹 '트라이앵글' 출신입니다. 표절 논란으로 강제 해체된 뒤 20년이 지났고, 각자는 생계형 방송 리포터, 빚더미 위의 솔로, 재벌가 며느리라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설정이 남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전직 직장인으로서의 명함이 사라진 순간, 사람들이 저를 보는 눈이 달라지더군요. 그 눈빛이 조용히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냥 은퇴자지."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이런 상황을 '대자존재(être-pour-soi)'와 '즉자존재(être-en-soi)'의 충돌로 설명합니다. 즉자존재란 돌덩이처럼 고정된 것, 즉 타인이 나에게 붙여 놓은 꼬리표를 의미합니다. 반면 대자존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새로워질 수 있는 인간 고유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돌은 돌이지만 인간은 언제든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트라이앵글 멤버들이 다시 무대로 걸어 나가는 장면은 바로 그 선언의 순간이었습니다.
사르트르의 핵심 명제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는 이 맥락에서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실존이란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이고, 본질이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하는 정체성입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본질 같은 건 없다고 말합니다. 스마트폰은 통화 기능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지만, 인간은 그냥 세상에 던져진 뒤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저도 처음엔 이게 막연한 위로처럼 들렸는데, 막상 귀농 준비를 하면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니 이 말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를 단순한 낙관론으로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핵심이 오히려 불편한 진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르트르는 자유로운 선택에 반드시 '실존적 책임(existential responsibility)'이 따른다고 강조했습니다. 실존적 책임이란 내가 내린 선택의 결과를 오롯이 내가 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말이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꽤 무거운 선언이 되는 셈입니다. 트라이앵글 멤버들도 재기에 실패하면 그 실패는 오롯이 자신들의 것이 됩니다. 그걸 알면서도 무대로 나서는 장면에서 저는 생각보다 훨씬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 즉자존재: 타인이 규정한 고정된 정체성 — "은퇴자", "실패한 가수"
- 대자존재: 스스로를 부정하고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능력
- 실존적 책임: 자유로운 선택에는 반드시 그 결과를 감당하는 책임이 뒤따름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정해진 본질 없이 태어난 인간이 행동으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철학이 현실 앞에서 흔들릴 때: 인생 2막에 실존주의를 어떻게 쓸 것인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셋이 커피 한 잔 마셨습니다. 현직에 있는 동료는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텐데"라며 웃었고, 작년에 퇴직해 여행 중인 분은 "일단 즐기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두 말 모두 완전히 공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즐기려 해도 불안이 따라오고, 새로 시작하려 해도 문이 잘 열리지 않는 것이 현실이거든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강력한 사상인 것은 맞지만, 이를 무조건 찬양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냉정하게 한 가지 허점을 짚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철학은 선택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데,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에는 연령 차별(ageism)이라는 단단한 벽이 있습니다. 연령 차별이란 나이를 이유로 기회와 자원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는 사회적 현상을 말합니다. 실제로 출처: 통계청(KOSIS)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55세 이상 중장년층의 고용 형태 중 임시·일용직 비중이 상용직을 크게 웃도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개인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구조적 환경이 선택지 자체를 줄여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는 그냥 뜬구름 같은 위로에 불과한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적용 방식이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마음가짐과 방향 설정은 실존주의적으로, 실행 계획은 현실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귀농귀촌을 준비하면서 제가 배운 것도 결국 그 지점이었습니다. "나는 농부가 되겠다"는 실존적 선언만으로는 부족하고, 농지 임대 계약, 초기 자본 계획, 지역 커뮤니티 진입 같은 구체적인 행동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요.
이와 관련해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권고하는 단계적 전직 모델은 참고할 만합니다(출처: 한국노인인력개발원). 핵심은 기존 역량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유한 전문성(domain expertise)을 새로운 분야에 이식하는 방식입니다. 전문성 이식이란 30년간 쌓은 경험과 네트워크를 완전히 새로운 직종에 연결해 진입 장벽을 낮추는 전략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 영업 출신이라면 그 협상력과 인맥을 활용해 소규모 유통 컨설팅으로 전환하는 식입니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의 명함은 버리되 그 명함 뒤에 쌓인 실력은 가지고 가는 것이 실존적으로 현명한 선택입니다.
저는 지금 귀농귀촌의 의지가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걸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도시로 돌아가는 것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저만의 답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라는 걸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트라이앵글 멤버들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오늘 제가 내리는 작은 선택 하나가 결국 3년 뒤 제 모습을 만든다는 것, 그게 사르트르가 남긴 진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와일드 씽>은 어떤 분들께 특히 잘 맞을까요?
A. 40~60대 중장년층이라면 주인공들의 상황이 남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순한 복고 코미디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제가 직접 보니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나"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영화였습니다. 철학적 고민 없이 웃고 즐기기에도 충분히 유쾌합니다.
Q. 사르트르 실존주의를 처음 접하는데 어디서 시작하면 좋을까요?
A.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가장 얇고 접근하기 편한 텍스트입니다. 강연 원고를 묶은 책이라 철학서 특유의 어려움이 덜한 편입니다. 읽다가 막히면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개념과 함께 읽으면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됩니다.
Q. 퇴직 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데 나이가 걸립니다. 실제로 가능한가요?
A. 가능하다고 말하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구조적 어려움을 인정한 뒤 시작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령 차별이라는 벽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을 무시한 채 "의지만 있으면 된다"고 접근하면 실망이 클 수 있습니다. 기존 전문성을 살리는 방향에서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Q. 귀농귀촌이 생각보다 힘들다고 하셨는데, 어떤 부분이 가장 어려웠나요?
A. 제 경험상 가장 힘든 건 '소속감의 공백'이었습니다. 직장이라는 구조가 사라지면 하루의 리듬 자체가 무너집니다. 텃밭 일이 그 공백을 조금 채워주긴 했지만, 수입과 관계망이 함께 무너지는 상황은 의지만으로 버티기 어렵습니다. 단계적으로 준비하는 시간이 충분히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결론
영화관을 나오며 세 사람이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만, 저는 분명히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내가 머뭇거리는 이 시간도 결국 하나의 선택이구나."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고, 그 결과도 온전히 제 것입니다.
실존주의를 만능 해결책처럼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보다는 방향 감각을 잡는 나침반으로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결국 삶에 적용될 때 의미가 생기고, 그 적용은 늘 구체적인 현실 위에서 이뤄집니다. 지금 인생 2막을 고민 중이시라면, 오늘 딱 한 가지만 실행해 보시는 걸 권합니다. 관심 있던 교육 등록이든, 오래 미뤄온 전화 한 통이든, 그 작은 행동이 여러분의 새로운 본질을 천천히 만들어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