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에세이19

'AI를 사용하는 창작자는 어떻게 자기 글의 독창성을 지킬 것인가’ 《오마주》와 《동주》가 묻는 창작자의 자리 "나는 왜 이것을 쓰는가." 이 질문이 떠오른 건 화면 앞이 아니라, 글이 완성된 직후였습니다. AI가 정리해준 문장을 읽다가 손이 멈췄습니다. 문장은 매끄러웠고, 흐름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낯설었습니다. 《오마주》의 지완과 《동주》의 윤동주,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창작자가 같은 질문 앞에 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오래된 필름 앞에서, 지완은 무엇을 보았는가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2022년 개봉한 신수원 감독의 《오마주》에서 중년의 여성 감독 지완은 1962년 홍은원 감독의 영화 《여판사》를 복원하는 일을 맡습니다. 거창한 사명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그 일이 생겼습니다.지완이 낡은 필름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소리도 없고, 대사도 없이, .. 2026. 10. 10.
가족은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 다시 말을 거는 곳이다 《남매의 여름밤》과 아리스토텔레스, 부버의 관계 철학 여름밤, 할아버지 집 평상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있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닙니다. 부채 하나 들고 더위를 쫓으면서, 서로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그냥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장면을 보다가 저는 이상하게 눈이 뜨거워졌습니다.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그냥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것, 그게 왜 이렇게 낯설고 동시에 그리웠을까요.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가려 합니다. 스포일러보다는 그 장면이 남긴 감정에 집중해서요.함께 있는 시간이 왜 이렇게 어색해졌을까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2020)은 옥주와 동주 남매가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의 오래된 2층 양옥집에서 여름을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모도 함께 지냅니다. 104분 동안 거대한 사건은.. 2026. 10. 5.
결국 취업은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걸까 《행복을 찾아서》와 아마르티아 센의 역량접근법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 정말 믿으십니까? 저는 고용센터 교육을 마치고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오다가 그 질문이 목에 걸렸습니다. 교육을 받은 뒤에도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을 찾아야 하지?"라는 물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떠올린 영화가 하나 있었습니다. 2006년 개봉한 윌 스미스 주연의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yness)》였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영화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단순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노력과 기회 사이에 놓인 간극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크리스는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그토록 오래 힘들었을까영화 속 크리스 가드너는 쉬지 않습니다. 의료기기를 들고 거리를 뛰고, 무급 인턴십 면.. 2026. 10. 1.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하이데거의 피투성, 불교의 무상 "우리는 자신의 탄생을 선택하지 않았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남긴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솔직히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당연한 말 아닌가,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실업 이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하루들을 보내다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떠올렸을 때, 그 말이 갑자기 다르게 읽혔습니다. 당연한 말이 아니라,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상실을 경험한 모든 사람에게 피투성(Geworfenheit)과 무상(無常)이라는 두 개의 렌즈를 건네며 묻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뒤, 당신은 어떻게 살 것입니까.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불길 속에서 굳어버린 소년 — 피투성이란 무엇인가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2026. 9. 27.
이 나이에 무슨 꿈이냐고 묻는다면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와 보부아르가 말하는 새로운 가능성 "이 나이에 무슨 꿈이야."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도 반박할 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억울하기도 한 그 기분.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를 보고 나서야 그 이상한 감각의 정체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토리의 결말보다는 아다 해리스가 파리에서 마주한 장면들, 그 안에 숨어 있는 철학적 질문에 집중할 것입니다.아다가 드레스 앞에서 멈춘 이유1957년 런던, 가정부 아다 해리스는 고객의 옷장에서 크리스티앙 디올의 드레스를 발견합니다. 앤서니 페이비언 감독은 이 장면을 길게 끌지 않습니다. 아다의 손이 천천히 옷감에 닿고, 카메라는 그 손을 가만히 따라갑니다. 대사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침묵.. 2026. 9. 22.
달빛아레, <시네마 천국>, 떠남과 뿌리 사이 — 지역소멸의 도시에서 영화음악을 들으며 시몬 베유와 웬델 베리에게 '남는 일'의 의미를 묻다 영사실에서 흘러나온 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순간, 어른이 된 토토는 혼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 한 통. 수십 년 전 신부의 손에 잘려 나간 키스 장면들을 몰래 이어 붙인 그것.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그가 흘리는 눈물이 성공한 감독의 감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린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뿌리내림과 뿌리 뽑힘, 떠남과 남음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서 본 그 자리.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자리를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려 합니다.알프레도는 왜 "돌아오지 말라"고 했을까영화 속에서 알프레도는 고향 마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은 저주받았다." 그러면서 청년 토토에게 단호하게 이릅니다. 돌아오지 말라고, 우리를 생각.. 2026. 9. 17.
시든 채소를 다듬고 나서 <경주기행>을 보았다 — 복수, 애도, 그리고 시간에 관한 짧은 사유 냉장고를 열었을 때, 텃밭에서 가져온 채소들이 반쯤 시들어 있었습니다. 가지, 호박, 양배추. 다듬고 버리고 정리하다 보니 오전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고서 본 영화가 하필 복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시든 채소를 정리하는 일과 8년 된 한을 들고 경주로 향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어딘가 겹쳐 보였습니다. 둘 다,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요.멈춰 있는 시간에 대하여 — 복수는 왜 하고 싶어지는가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장면들을 떠올려 보려 합니다.엄마 옥실은 8년을 기다렸습니다. 막내딸 경주가 돌아오지 않은 그날부터, 가해자가 출소하는 날까지. 그 8년이 얼마나 다른 시간이었을지,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습니다.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복수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 2026. 9. 11.
30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메밀꽃: 《메밀꽃 필 무렵》 × 칸트 × 《천국의 나날들》 넓은 밀밭이 바람에 쓸린다. 카메라는 아무도 쫓아가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다. 테런스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1978)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인물의 대사가 아니라 바로 그 장면입니다. 황금빛 들판이 저녁 빛에 잠기는 그 몇 초 동안, 저는 스크린 앞에서 이상한 질문 하나를 붙들고 있었습니다."아름다움이란 것은, 볼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일까?"그 질문이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봉평의 메밀꽃밭 앞에 섰을 때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달빛 아래 메밀꽃과 맬릭의 들판, 그 풍경이 묻는 것30여 년 전 처음 봉평을 찾았을 때는 솔직히 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이효석 문학관 입구를 서두르던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무엇을 먹일지, 다음 목적지까지 시간이 .. 2026. 9. 7.
《묻어둔 여름》 × 미셸 푸코: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이라고 말하는가 평일 아침에 극장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날 저를 조금 낯선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나이대의 분들이 보였고, 다들 저처럼 조용히 앉아 스크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극장에 있으면 안 되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그 작은 의문이 영화가 끝난 뒤 훨씬 더 큰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누구의 허락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스캔들이 아니라 시선이 그들을 무너뜨렸다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영화를 먼저 보신 뒤 이 글로 돌아오셔도 좋습니다.1810년, 에든버러의 두 여성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갑니다. 그들이 누군가를 해친 것도, 법을 어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생 하나가 두 사.. 2026. 9. 5.
게임을 하는 아들과 영화를 보는 엄마, 그래도 우리는 함께 있었습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 × 마르틴 부버 가족이란 서로를 가장 잘 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어쩌면 우리는 가족을 오래 알았다는 이유로, 정작 지금 이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장 늦게 알아채는 건 아닐까요. 저는 아들과 PC방에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화면을 들여다보던 어느 저녁에, 그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붙잡았습니다.《미스 리틀 선샤인》(2006)은 조나단 데이톤과 발레리 페리스 감독이 만든 가족 로드무비입니다. 영화는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낡은 폭스바겐 승합차 한 대. 그 안에 탄 여섯 명은 각자의 실패와 고집과 침묵을 품고 달립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같은 마음으로 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끝까지 함께 달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이.. 2026. 9. 1.
가족을 위해 살다 보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바튼 핑크》 × 실존주의 호텔 방 벽지가 천천히 부풀어 오릅니다. 뜨거운 습기에 풀이 녹아 벽에서 종이가 떨어지고, 바튼 핑크는 타자기 앞에 앉아 있습니다. 아무것도 써지지 않습니다. 그는 위대한 서민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옆방 서민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타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작가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역할에 지쳐버린 누군가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호텔방이라는 이름의 역할 감옥1991년 코엔 형제가 연출한 《바튼 핑크》는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극작가가 할리우드로 건너가 창작의 벽에 부딪히는 이야기입니다. 무대는 거의 한 곳, 얼스 호텔 621호실입니다.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불쾌할 만큼 답답하고, 이야기는 어.. 2026. 8. 17.
폭풍은 인간을 벌하는가? 《퍼펙트 스톰》으로 읽는 노자의 자연철학 폭풍은 정말 인간을 벌한 걸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우리가 스스로 그 자리에 걸어 들어간 건 아닐까요?계약 만료 이후 실업 상태로 맞이한 이번 여름은 유독 길게 느껴집니다. 밖에 나가기엔 너무 덥고, 카페에 앉아 있자니 통장이 걱정되고. 에어컨도 마음껏 못 트는 분들이 뉴스에 나올 때면, 기후 위기란 단어가 갑자기 아주 가깝게 다가옵니다. 그 무더운 오후에 저는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다시 꺼내 틀었습니다. 바로 2000년에 개봉한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퍼펙트 스톰(The Perfect Storm)》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폭풍이 온 게 아니라, 우리가 폭풍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글로스터 항구의 어선 안드레아 게일이 더 많은 어획.. 2026. 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