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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하는 아들과 영화를 보는 엄마, 그래도 우리는 함께 있었습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 × 마르틴 부버

by cinema-1 2026. 9. 1.

가족이란 서로를 가장 잘 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어쩌면 우리는 가족을 오래 알았다는 이유로, 정작 지금 이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장 늦게 알아채는 건 아닐까요. 저는 아들과 PC방에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화면을 들여다보던 어느 저녁에, 그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붙잡았습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2006)은 조나단 데이톤과 발레리 페리스 감독이 만든 가족 로드무비입니다. 영화는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낡은 폭스바겐 승합차 한 대. 그 안에 탄 여섯 명은 각자의 실패와 고집과 침묵을 품고 달립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같은 마음으로 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끝까지 함께 달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함께 있다는 것은 무엇을 공유하는 걸까요?

우리는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아들이 지방에서 직장을 다닌 지 꽤 됐습니다. 가까운 친구도 드물고, 퇴근 후 스트레스를 게임으로 푼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냥 넘기던 시간이 쌓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들이 먼저 말했습니다. "엄마, 같이 PC방 갈래?" 솔직히 처음엔 이게 무슨 초대인가 싶었습니다. 저는 게임을 거의 할 줄 모릅니다. PC방이 편한 공간도 아닙니다.

그래도 갔습니다. 아들은 헤드셋을 끼고 화면에 집중했고, 저는 옆자리에서 OTT로 영화를 보고 뉴스를 훑었습니다. 두 시간 남짓 우리는 말 한마디 거의 없이 각자의 화면을 봤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함께한 것 맞나? 그런데 또 이런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왜 맞지 않다고 느끼는 걸까?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관계를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나-그것(I–It) 관계와 나-너(I–Thou) 관계입니다. 여기서 나-그것 관계란, 상대방을 어떤 역할이나 기능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 사람은 내 아들이다, 그러므로 취업해야 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식의 시선입니다. 반면 나-너(I–Thou) 관계란, 상대를 역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한 사람 자체로 만나는 것을 뜻합니다(출처: 마르틴 부버, 『나와 너』, 1923).

솔직히 말하면 저는 아들을 오랫동안 나-그것의 시선으로 봐왔는지도 모릅니다. 취업을 해야 하는 사람, 자립해야 하는 사람, 앞으로를 준비해야 하는 사람. 그게 다 걱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걱정 안에는 지금 이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는지 묻는 질문이 빠져 있었습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의 가족도 비슷합니다. 성공을 강요하는 아버지는 딸을 응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의 성공 철학을 딸에게 투영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 위에 자신의 기대를 덧씌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버가 경고한 나-그것 관계의 함정입니다.

그날 PC방에서 저는 아들에게 게임을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게임이 왜 좋냐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옆에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그것이 어쩌면 오랜만에 아들을 역할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난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과 마르틴 부버의 철학사상

 

 

이해하지 못해도 곁에 있다는 것의 무게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이 있습니다. 말을 잃은 손녀와 할아버지 사이의 시간입니다. 두 사람은 세대도 다르고 살아온 방식도 전혀 다릅니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를 가장 잘 받아들입니다. 이유를 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그냥 옆에 있어주기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오이마 요시토키 작가는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해가 됩니다. 진짜 관계는 문제를 해결해서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해결되지 않은 채로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는 철학적 흐름이 있습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질 없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입장을 뜻합니다. 장폴 사르트르가 대표적이지만, 부버는 조금 다른 각도를 더합니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결국 내가 타인을 어떻게 만나느냐와 연결된다고 봤습니다(출처: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Martin Buber 항목). 혼자의 선택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입니다. 아이를 보호하던 시절과, 같이 걸어가는 지금은 만남의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 저는 아들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대신 이런 것들을 조금씩 해보려고 합니다.

  • 아들이 좋아하는 게임이나 영화를 "왜 좋아해?"가 아니라 "그게 어떤 점이 재미있어?"로 물어보기
  • 제가 좋아하는 지역 행사나 국선도 수련을 가끔 보여주되, 함께 해야 한다는 기대 없이 초대하기
  • 서로 연락 없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날도 멀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세대가 다르면 좋아하는 것도 다릅니다. 20대가 PC방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고, 60대가 게임을 모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중요한 건 그 다름을 메우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다름이 있어도 같은 시간을 불편하지 않게 공유할 수 있느냐입니다.

사춘기에는 함께 밥 먹는 것도 싫어하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손을 잡는 방식이 예전과 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의 그 가족이 결국 낡은 승합차를 함께 밀어 시동을 거는 장면처럼, 관계도 가끔은 말없이 같이 밀어주는 것만으로 다시 달릴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지금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화면을 보고 있나요? 그리고 당신은 옆에 앉아볼 준비가 되어 있나요?

 

생활 속에서 실천해 볼 수 있는 작은 방법

 

성인이 된 자녀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면 이런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자녀의 취미를 바로 판단하지 않기

“왜 그런 것을 좋아하니?”라고 묻기보다

“그게 어떤 점이 재미있니?”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판단보다 이해가 먼저 시작될 수 있습니다.

  1. 서로의 취미를 한 번씩 경험해보기

자녀가 좋아하는 영화나 음식,

부모가 좋아하는 활동이나 장소를

서로에게 한 번씩 소개해볼 수 있습니다.

좋아하게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상대가 왜 좋아하는지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1. 함께하지 않는 시간도 존중하기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반드시 관계가 멀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자의 세계를 가진 뒤 다시 만나는 관계가 오히려 더 편안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3가지

  • 나는 자녀가 좋아하는 것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바꾸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 같은 취미를 가져야만 좋은 가족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 다음에는 아들과 어떤 새로운 시간을 함께 공유해보고 싶은가?

참고: https://namu.wiki/w/%EB%AF%B8%EC%8A%A4%20%EB%A6%AC%ED%8B%80%20%EC%84%A0%EC%83%A4%EC%9D%B8
https://plato.stanford.edu/entries/buber/
https://www.yes24.com/Product/Goods/229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