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세이5 아들은 자격증보다 먼저 어른이 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어바웃 타임》과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는 법(아리스토텔레스, 칸트, 에픽텍토스) 자녀가 어른이 되었다는 걸 증명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자격증 한 장, 통장 잔액, 아니면 안정적인 직함? 저는 한동안 그런 것들로만 아들의 성장을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중국집 저녁 한 끼를 계기로 멈칫했습니다. 그 멈칫함이 결국 《어바웃 타임(About Time, 2013)》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보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시간을 돌릴 수 있어도 바꾸지 못하는 것리처드 커티스 감독이 2013년에 내놓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 팀은 스물한 살이 되던 날,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비밀을 듣습니다. 남자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 처음에 팀은 그 능력을 사랑을 얻는 데 씁니다. 어색했던 첫 만.. 2026. 10. 4. 달빛아레, <시네마 천국>, 떠남과 뿌리 사이 — 지역소멸의 도시에서 영화음악을 들으며 시몬 베유와 웬델 베리에게 '남는 일'의 의미를 묻다 영사실에서 흘러나온 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순간, 어른이 된 토토는 혼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 한 통. 수십 년 전 신부의 손에 잘려 나간 키스 장면들을 몰래 이어 붙인 그것.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그가 흘리는 눈물이 성공한 감독의 감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린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뿌리내림과 뿌리 뽑힘, 떠남과 남음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서 본 그 자리.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자리를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려 합니다.알프레도는 왜 "돌아오지 말라"고 했을까영화 속에서 알프레도는 고향 마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은 저주받았다." 그러면서 청년 토토에게 단호하게 이릅니다. 돌아오지 말라고, 우리를 생각.. 2026. 9. 17. 풀들 사이에서도 부추는 향기를 냈습니다 《미나리》 × 빅터 프랭클 할머니 순자가 개울가에 미나리 씨앗을 뿌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닙니다. 거창한 선언도 없습니다. 그냥 쪼그려 앉아, 손에 쥔 씨앗을 흙과 물 사이에 놓아줍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저 씨앗은 지금 얼마나 많은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할까. 그리고 저는, 지금 어떤 땅에 씨앗을 심고 있을까.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장면의 의미를 천천히 생각해보려 합니다.살아남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 아칸소 주의 낯선 시골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한국계 이민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정이삭 감독이 2021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세상에 알려진 작품입니다.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 2026. 9. 3. 월요일 아침, 출근할 곳이 없어졌을 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니체 잡지사 사진 관리부의 작은 책상. 월터 미티는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키보드 위에 올려진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고, 눈은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빙하 위를 달리고, 화산 앞에 서고, 낯선 나라의 공기를 마십니다. 그러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면, 그는 다시 형광등 아래의 사무실로 돌아옵니다.저도 비슷한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단기 계약이 끝난 뒤 맞이한 첫 월요일 아침, 알람도 울리지 않았는데 눈이 먼저 떠졌습니다. 몸이 출근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창밖으로는 버스가 지나가고, 사람들은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건 저뿐이었습니다. 그 허전함 속에서 문득 월터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상상 속에서만 살던 남.. 2026. 8. 3. 〈쇼생크 탈출〉과 에픽테토스 — 감옥 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 모차르트의 아리아가 교도소 전체에 울려 퍼지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저는 한동안 숨을 참았습니다. 앤디 듀프레인이 방송실 문을 잠그고 마이크 앞에 앉아 레코드판을 올려놓는 그 몇 초 동안, 화면 너머의 저도 무언가에 잠기는 느낌이었습니다. 죄수들이 마당 한가운데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장면. 음악이 뭔지도 모를 텐데 모두가 잠시 다른 곳에 가 있는 표정. 〈쇼생크 탈출〉은 바로 그 순간에 질문을 던집니다. 저 사람들은 지금 자유로운가, 아닌가.감옥이 빼앗을 수 없는 것1994년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이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지금 돌아봐도 탈옥 영화라는 장르 안에 가두기가 민망합니다. 물론 앤디는 탈출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2시간 넘게 공들이는 것은 그 탈출의 순간이 .. 2026. 6. 23.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