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서 들려오는 자녀의 이력서 출력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가슴을 때립니다. 30년 넘게 직장과 가사를 병행하며 '가족의 기둥'으로 살아온 저 역시, 퇴직 후 야심 차게 딴 직업상담사 자격증이 '나이'라는 견고한 벽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연령차별 금지를 가르치는 자격증을 들고 정작 연령차별의 현장에서 인턴으로 끝난 제 삶은, 어쩌면 우리 세대 베이비부머들이 마주한 서글픈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무기력하게 휴대폰에서 오늘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며 점검 경로를 정합니다. 한때는 시멘트 분진 가루를 마시며 현장을 누비는 이 민간점검원 일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경고했던 '영혼 없는 전문가'들의 합리성의 철장(Iron Cage)처럼 느껴져 괴롭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매일 차를 몰고 현장의 악취와 분진을 점검하며, 저는 이 반복적인 업무 이면에서 예기치 못한 빛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지구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지키는 최전선의 '소명(Beruf)'이었습니다. 영화 <이키루(살다)>의 주인공 와타나베가 무미건조한 서류 더미를 뚫고 아이들을 위한 공원을 일궈냈듯, 저 또한 이 몇 개월의 계약 기간 속에서 제 생의 가장 생생한 존재감을 일구어보려 합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와 청년 세대, 엇갈린 취업 환경
현재 베이비부머 세대는 솔직히 운이 좋았습니다. 1970~198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 시기에 대학을 졸업했고, 줄만 서면 취업이 되던 때였으니까요. 80년대에 대학 입학을 앞두고 저의 부모님은 제가 공무원 되기를 바라셨지만 일단 저는 등록금이 저렴한 대학을 아르바이트로 어렵사리 졸업했으며 자아실현 같은 건 생각도 못 한 채 생계를 위해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30년 직장 생활 동안 '역할'에 충실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 일이 제 정체성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자녀 세대는 정반대입니다. 초중고 시절부터 철저한 진로교육을 받고 적성과 흥미에 따라 대학을 선택했지만, 정작 졸업 후엔 자신의 꿈을 펼칠 자리가 없습니다. 채용공고를 보면 경력 2~3년 이상을 요구하는 곳이 대부분이고, AI 기술 발달로 신입사원이 할 일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죠(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경력단절'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경력단절이란 육아나 간병 등의 이유로 일정 기간 노동시장을 떠났다가 재진입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예 경력을 시작할 기회조차 못 얻는 청년들이 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현실이 너무 답답해서 은퇴 후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자녀뿐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청년들을 돕고 싶었거든요.
직업상담사 도전과 나이 제한의 벽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커리어 개발(Career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을 배웠습니다. 커리어 개발이란 개인이 평생에 걸쳐 자신의 직업 정체성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저는 이 개념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30년 직장 생활이 생계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제 경험을 살려 다른 사람의 커리어 개발을 돕는 게 제 2막 소명이 될 거라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자격증을 따고 여러 곳에 지원했지만 대부분 나이 제한에 걸렸습니다. 몇 군데 인턴으로 일했지만 정규직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직업상담사로 배운 내용 중 하나가 '연령차별금지'였는데, 정작 저 자신이 그 차별을 온몸으로 겪은 겁니다(출처: 고용노동부 고령자고용법).
구직 활동을 하면서 절감한 건, 직업을 선택할 때 필요한 요소들이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저희 때는 '안정성'과 '급여'만 따졌지만, 지금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중요해졌습니다.
-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 보장 여부
- 자기계발과 역량 강화 기회
- 조직 문화와 수평적 소통 가능성
- 사회적 의미와 개인적 가치 실현
제 자녀도 이런 기준으로 직장을 고르고 싶어 하지만, 선택지 자체가 없으니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습니다.저는 하루속히 직업상담사로 취업하여 자녀를 돕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정규직 직업상담사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했지만 불합격 문자를 받았고 추후 고용노동부 중장년내일센터를 통해 중장년 경력지원제에 지원하여 3개월 인턴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몇몇 중장년 지인들의 취업을 도왔고 그 일이 마치 저의 소명처럼 느껴졌지만 나이 제한으로 직업상담사로서의 더이상의 취업은 어려웠습니다. 그 후 저는 중장년들의 취업을 어떻게든 돕고자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틈틈이 중장년들에게 도움이 되는 직업정보들을 탐색하는 일이 참으로 보람이 있으며 제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더군요.
다시, 일하는 오늘 ! 다시 쓰는 이력서
퇴직 전 해마다 시작은 있었으나 인생을 걸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퇴직 후 인생의 새로운 시작 인생 3막이 열렸고 두렵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습니다. 퇴직 후 방황의 시간을 지나 다시 시작하
ethos34.co.kr
민간점검원, 단순 업무에서 찾은 환경 보호 소명
그렇게 여러 번 좌절한 끝에 시청 민간점검원 공고를 보게 됐습니다. 단기 계약직이고 급여도 높지 않았지만, 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지원했습니다. 합격하고 나서 매일 아침 에어코리아 앱으로 대기질을 확인하고, 시멘트 공장 주변 분진 농도를 측정하고, 축사 악취를 점검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이 일이 막스 베버가 말한 '합리성의 철장(Iron Cage)' 같았습니다. 철장이란 현대 사회의 관료제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효율성을 위한 부품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비유한 표현입니다. 단순 반복 업무를 하면서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나' 싶은 순간도 많았거든요. 게다가 운전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매일 차를 몰고 현장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점검한 공사 현장에서 분진 저감 조치를 취하는 걸 보고, 악취 민원을 제기한 주민이 고맙다고 인사하는 걸 경험하면서요. 이 일이 단순히 저를 가두는 철장이 아니라, 지구 환경을 지키는 최전선 역할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베버가 강조한 '소명으로서의 직업(Beruf)'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소명이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천직을 의미하는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사회적 의미를 가진 일에 헌신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이키루>에서 주인공 와타나베는 30년간 시청 민원과장으로 서류만 넘기다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서야 비로소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합니다. 관료제의 벽을 뚫고 오염된 웅덩이를 공원으로 만드는 거죠. 저 역시 지금 몇 개월 남지 않은 계약 기간이지만, 남은 시간 동안 이 일을 제 소명으로 여기고 책임을 다하려 합니다.
요즘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각종 공사 현장이 가동되고 농가의 밭갈이 작업이 시작돼 미세먼지가 극성입니다. 'PM2.5(초미세먼지)' 수치가 '나쁨'을 넘어 '매우 나쁨'까지 치솟는 날도 많습니다. PM2.5란 입자 지름이 2.5마이크로미터 이하인 미세먼지로, 폐포까지 침투해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현장에서 계도 업무를 할 때 비협조적인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취지를 이해하고 협조해 주십니다. 그럴 때마다 보람을 느낍니다.
중년의 재취업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자격증을 따도, 경험이 있어도 나이라는 숫자 하나 때문에 문전박대당하는 게 현실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제 역할을 찾았습니다. 종량제 봉투 세 장을 아끼고, 우리 동네 대기질을 꼼꼼히 살피는 이 작은 소명이 거대한 자본의 논리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믿습니다. 와타나베가 눈 내리는 공원 그네에서 노래를 부르며 느꼈을 그 생생한 존재감을, 저도 지금 매일 아침 현장에 나가며 체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