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황금표범상을 수상한 한국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이게 정말 영화인가' 싶었습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대사보다 침묵이, 설명보다 이미지가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1700년 전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 혜능스님이 설파했던 깨달음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글을 모르는 나무꾼에서 선불교의 혁명가가 된 혜능의 사상이 어떻게 20세기 한국 영화 속에서 되살아났는지, 제 경험과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글을 몰라도 깨달을 수 있다는 혜능의 돈오 사상
혜능(慧能, 638-713)은 선종(禪宗)의 핵심 인물입니다. 여기서 선종이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경전 해석이 아닌 마음의 직관적 깨달음으로 이해하는 불교 종파를 의미합니다. 혜능은 본래 중국 남부의 가난한 나무꾼이었고, 문자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불교는 복잡한 경전 해석과 지식을 중시하는 귀족 중심의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혜능은 이런 시대에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는 게송으로 제5조 홍인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쉽게 말해 깨달음이란 밖에서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자기 안에 있던 청정한 본성을 자각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가르침을 기록한 《육조단경(六祖壇經)》에는 '돈오(頓悟)'와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핵심 개념이 등장합니다.
돈오란 점진적으로 수행해서 단계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즉각적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견성성불이란 자신의 본성(自性)을 보는 순간 바로 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는 솔직히 이해가 안 됐습니다. 수행도 안 하고 어떻게 갑자기 깨닫느냐고요. 하지만 오피스텔 투자로 손해를 본 후에야 이 말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집착을 놓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자유였습니다.
혜능은 또한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라는 수행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무념이란 생각이 아예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생각을 하되 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 상태입니다. 무상이란 겉으로 드러난 형상이나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무주란 흐르는 물처럼 마음이 어느 한 곳에도 머물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인 7역 감독이 빚어낸 영상시의 철학
배용균 감독은 대구의 한 대학 교수였습니다. 그는 기획 8년, 제작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홀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감독, 각본, 촬영, 조명, 미술, 편집, 제작까지 1인 7역을 소화했습니다. 충무로 시스템 바깥에서 탄생한 이 작품은 1989년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표범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한국 영화 역사상 서구 주요 영화제에서 거둔 최초의 그랑프리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제작 방식 자체가 혜능 철학과 닮았다고 봅니다. 거대 자본이나 시스템 없이 오직 개인의 직관과 통찰만으로 세계적 예술을 만들어낸 것이니까요. 혜능이 문자를 몰라도 깨달음에 이르렀듯, 배용균 감독은 충무로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도 걸작을 빚어냈습니다. 영화는 대사가 극히 적고, 대신 바람 소리, 물소리, 새 울음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가 화면을 채웁니다.
영화 오프닝에는 "그는 진리를 묻는 제자 앞에 말없이 한 송이 꽃을 들어 보였다"는 자막이 나옵니다. 이는 석가모니와 가섭 존자 사이의 염화미소(拈華微笑) 일화입니다. 여기서 염화미소란 언어가 아닌 침묵과 미소로 진리를 전하는 불교의 교외별전(敎外別傳) 방식을 의미합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언어와 논리가 아닌 이미지와 침묵으로 법문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단 한 번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이 없는 장면들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더군요.
세 명의 수행자가 보여주는 무주와 집착의 차이
영화는 깊은 산속 암자에서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입적을 앞둔 노스님 혜곡, 번뇌하는 젊은 수좌 기봉, 그리고 순수하지만 무명에 싸인 동자승 해진입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수행 단계를 상징합니다.

노스님 혜곡은 이미 견성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삶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습은 혜능이 말한 무주(無住), 즉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 그 자체입니다. 제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혜곡이 제자에게 끊임없이 형상(相)을 깨트릴 것을 주문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말로 설명하지 않고, 그저 존재로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이었습니다.
기봉은 도를 구하기 위해 출가했지만, 속세에 두고 온 눈먼 노모에 대한 걱정으로 괴로워합니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며 고행하지만, 바로 그 집착이 깨달음을 가로막습니다. 혜능이 경계했던 점수(漸修), 즉 점진적 수행의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저 역시 과거에 자식들이 제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고 탓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는 것 자체가 집착임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동자승 해진은 장난으로 던진 돌에 새가 맞아 죽자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새의 시신은 썩어가고 구더기가 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무상(無常), 즉 모든 것은 변하며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형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그것을 더럽거나 슬픈 것으로 규정할 뿐입니다. 혜능의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가르침은 이 자연의 순환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다비식 장면에서 터진 기봉의 돈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혜곡 스님의 다비식(茶毘式) 장면입니다. 여기서 다비식이란 불교에서 스님이 입적한 후 화장하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기봉은 스승의 시신을 관도 없이 맨 몸으로 장작 위에 올리고 불을 붙입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이 장면은 충격적일 만큼 사실적이었습니다. 불길 속에서 육신은 한 줌의 재로 돌아갑니다.
기봉은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하며 스승의 육신이라는 형상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 순간이 바로 그의 돈오(頓悟), 즉 즉각적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성스러움과 속됨,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불길 속에서 그는 혜능이 말한 자성청정(自性淸淨), 즉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 자리를 확인합니다. 스승의 육신에 대한 마지막 집착마저 태워버림으로써 그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영화에는 소(牛)가 자주 등장합니다. 선불교에서 소는 심우도(尋牛圖)에 나오듯 잃어버린 본래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심우도란 수행자가 소를 찾고, 길들이고, 결국 소와 자신이 모두 사라지는 과정을 그린 10장의 그림입니다. 소를 찾는 행위는 밖에서 무언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는 견성의 과정입니다(출처: 문화재청).
저도 과거 부동산 투자로 더 많이 소유하려고 애쓴 적이 있습니다. 당시엔 그게 시대를 따라가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손해를 보고 처분하면서 섣부른 욕심의 허망함을 깨달았습니다. 영화 속 기봉처럼, 제게도 그 순간이 일종의 돈오였던 셈입니다.
영화 마지막, 기봉은 봇짐 하나를 메고 산을 내려갑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더 이상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無住)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집착이 사라진 자에게는 머무는 곳이 곧 깨달음의 터전입니다. 1700년 전 혜능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 "당신의 자성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물음이 이 영화를 통해 다시 울려퍼집니다.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본 후 제 삶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우리는 종종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정작 달은 보지 못합니다. 요즘 환경 문제나 사회 문제를 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의 분석보다 내 안의 직관이 먼저 위기를 감지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는 것을 수행의 시작으로 봅니다. 외부의 자극적인 것들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배용균 감독의 이 영상시(映像詩)는 말없이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