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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의 고구마와 아들의 직장 걱정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에픽테토스

by cinema-1 2026. 9. 8.

"네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하는 한, 너는 노예다." 에픽테토스가 이 말을 했을 때, 그는 로마 제국에서 실제로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텃밭에서 남편 전화를 받던 날 이 문장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텃밭 고구마와 아들 직장 걱정 사이에서, 내가 진짜 살고 있는 삶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2020년 김초희 감독이 연출한 장편 데뷔작입니다. 강말금, 윤여정, 윤승아, 배유람이 주연을 맡았고, 감독 자신의 실직 경험이 깊이 녹아 있습니다.

찬실이가 잃은 것, 그리고 남은 것

영화 프로듀서 찬실은 어느 날 갑자기 일을 잃습니다. 함께 일하던 감독이 술자리에서 급사하고, 준비 중이던 영화는 엎어집니다. 그녀가 잃은 건 직업만이 아닙니다. 십수 년간 쌓아온 정체성, 그리고 하루하루의 방향감각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찬실이 막막한 이태원 산동네 하숙방에서 "이 풍진 세상을~"이라고 흥얼거릴 때, 그게 체념인지 농담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아마도 둘 다였겠지요.

솔직히 처음엔 영화가 너무 조용해서 답답했습니다. 갈등을 해결해주지 않고, 교훈을 정리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그 조용함이 제 일상의 소음과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들이 전화를 하고, 텃밭은 제 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찬실이 혼자 고요 속에 앉아 있는 장면이 저와 닮아 보였습니다.

영화는 찬실에게 새로운 성공을 쥐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녀가 잃어버린 것들 사이에서 자기 삶의 자리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 과정이 화려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진짜처럼 느껴집니다.

에픽테토스가 말한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에픽테토스(Epictetus)는 스토아 철학(Stoicism)의 대표적인 사상가입니다. 스토아 철학이란 외부 환경이 아닌 내면의 태도를 다스리는 것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해 로마 시대에 꽃핀 이 사상은, 에픽테토스가 노예 신분으로 살면서도 내면의 자유를 지킬 수 있었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핵심 개념은 '프로아이레시스(Prohairesis)'입니다. 프로아이레시스란 의지의 선택 능력, 즉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내면의 영역을 뜻합니다. 에픽테토스는 세상을 두 가지로 나눌 것을 권합니다.

  •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 나의 판단, 나의 욕구, 나의 행동
  •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 다른 사람의 선택, 날씨, 타인의 감정, 결과

(출처: Epictetus, 《Enchiridion》, 1장)

텃밭으로 향하던 날, 저는 비가 많이 왔으니 작물이 괜찮겠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땅은 다시 말라 있었고 작물들은 시들어 있었습니다. 자연은 제 계획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남편 전화가 왔습니다. "고구마가 잘 여물었을 테니 한번 캐봐." 그 말에 화가 났습니다. 사실 고구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몇 달 동안 텃밭을 혼자 감당해왔다는 느낌, 아들 걱정도 제 몫이라는 느낌이 그 한 마디에 터진 것이었습니다.

에픽테토스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화를 내는 이유는 상대방의 말 때문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그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입니까?"

걱정은 사랑이지만,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아들이 자주 전화합니다. 직장이 너무 힘들다고, 그만두고 싶다고 합니다. 저는 그때마다 여러 생각이 교차합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지 않을까."
"지금 그만두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
"그래도 정규직인데."

이 생각들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생각들이 제 것이 아닌 삶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과잉 개입(Enmeshment)'이라고 부릅니다. 과잉 개입이란 가족 간 경계가 흐릿해져서 서로의 감정과 문제가 뒤섞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것이 자녀의 결정을 대신 짊어지는 것으로 이어지면 오히려 자녀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경험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출처: Salvador Minuchin, 《Families and Family Therapy》, Harvard University Press)

찬실도 영화 안에서 비슷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들의 호의를 받으면서도, 결국 자기 삶의 방향은 자신이 찾아야 한다는 것을 천천히 알아갑니다. 그 과정이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더 와닿았습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들의 인생을 대신 결정하는 것, 그것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이 경계를 말로 표현하면 차갑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것이 아들을 한 명의 독립된 어른으로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에픽테토스의 철학사상

 

내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연습

 

귀농귀촌을 준비하면서 저는 모든 것이 갖춰져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텃밭도 잘 관리해야 하고, 경제적인 계획도 서야 하고, 지역사회 적응도 준비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텃밭은 그런 완벽함을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멈춘 이유는, 찬실의 마지막 장면과 겹쳤기 때문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찬실은 아코디언으로 희망가를 연주합니다. 그 장면은 거창한 변화가 아닙니다. 다만 자기 방식으로, 자기 속도로, 한 발짝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에픽테토스는 말합니다.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힘을 쏟는 것은, 스스로를 방해하는 일이다." 이 문장을 귀농귀촌에 적용하면 이렇게 읽힙니다. 비가 오지 않아도 땅이 마르는 것, 남편이 텃밭을 신경 쓰지 않는 것, 아들의 직장이 힘든 것, 이것들은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남편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이야기한다. 고구마가 문제가 아니라, 함께 책임지고 싶다는 말을 한다.
  2. 아들의 이야기를 듣되, 결정은 아들에게 돌려준다.
  3. 오늘 텃밭이 버겁다면 잠시 쉬고, 내일 다시 걷는다.
  4. 귀농귀촌을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위해 천천히 만들어간다.

완벽한 준비가 된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행착오가 곧 그 삶의 내용이 되기도 합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질문을 남깁니다. 저는 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아직 살지 못한 내 삶은 어디에 있는가. 에픽테토스도 영화도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내 자리에서 내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도 사랑의 한 형태라는 것. 오늘 텃밭에서 화가 났던 일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화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질문을 꺼내준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질문 앞에 서 있으신가요.

 

생각해볼 질문

  • 나는 가족을 걱정하는 것과 가족의 삶을 대신 책임지는 것을 구분하고 있는가?
  • 가족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 상대를 탓하기 전에 내가 실제로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 가족의 삶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더라도 내가 지금부터 살아가고 싶은 나만의 삶은 무엇일까?

참고: https://namu.wiki/w/%EC%B0%AC%EC%8B%A4%EC%9D%B4%EB%8A%94%20%EB%B3%B5%EB%8F%84%20%EB%A7%8E%EC%A7%80
https://www.gutenberg.org/ebooks/45109
https://www.hup.harvard.edu/books/9780674292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