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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을 얻었다고 성장한 것일까 《부활남: 더 레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다음 소희》와 아리스토텔레스·센·아렌트의 노동 철학

by cinema-1 2026. 10. 9.

첫 직장에 합격하면 그게 성장일까요. 아니면 성장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걸까요. 《부활남: 더 레드》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 저는 한동안 이 질문을 놓지 못했습니다. 석환이 첫 출근하는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는데, 어딘가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해피엔딩이라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제 시작인데'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 찜찜함의 정체를 찾다 보니 두 편의 영화와 세 명의 철학자에게까지 닿게 됐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장면을 다루는 내용이 포함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석환의 첫 출근이 불편했던 이유

석환은 31세 취업준비생입니다. 2026년 9월 개봉한 《부활남: 더 레드》에서 그는 면접장마다 떨어지고, 급기야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72시간 뒤 아무렇지 않게 눈을 뜹니다. 죽을수록 강해지는 능력을 얻은 셈입니다. 영화는 그 능력으로 역경을 돌파하는 과정을 그리고, 마지막에 석환의 첫 출근 장면을 보여줍니다.

솔직히 처음엔 이 엔딩이 꽤 통쾌했습니다. 계속 떨어지던 사람이 결국 해냈으니까요. 그런데 장면을 다시 떠올릴수록 한 가지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저에게는 현재 지방 소도시 생산직에서 일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석환처럼 화려한 자격증도, 넘치는 자신감도 없습니다. 그 아들을 떠올리면서 저는 석환의 첫 출근을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게 불편함의 정체였습니다. 저는 아들을 보면서 석환의 기준을 들이대고 있었던 겁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이 불편함에 답을 하나 줍니다. 영화는 1995년 대기업에 다니는 고졸 출신 여성 직원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입사 8년 차인데도 여전히 말단인 이들에게 토익 600점은 단순한 시험점수가 아닙니다. 닫혀 있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그들은 이미 실무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사회가 정한 기준 바깥에 있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취급을 받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제가 아들에게 해왔던 말들을 돌아봤습니다.

  • 자격증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데
  • 컴퓨터활용능력 시험은 다시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지금 회사는 너무 작지 않아
  • 사회복지사 공부는 왜 그만뒀어

스펙이 부족하다는 것과 그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같은 말이 아닌데, 저는 그 둘을 자꾸 섞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부활남:더레드>와 아리스토텔레스 센 아렌트의 노동철학사상 이미지

 

 

아리스토텔레스와 센이 보는 '좋은 삶'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의 조건으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를 제시했습니다. 에우다이모니아란 단순히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활동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상태보다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고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istotle's Ethics")

이 개념을 아들에게 가져와 보면 어떨까요. 아들은 지금 매일 출근합니다. 약속한 시간을 지킵니다. 자기 월급으로 생활의 일부를 책임집니다. 상사의 말을 듣고, 모르는 일을 배우고, 싫은 날도 버팁니다. 자격증 한 장이 없어도 이 모든 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익히는 능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지금 에우다이모니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겁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멈춘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저는 아들의 현재를 '결과가 부족한 상태'로 보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시작 중인 과정'이었을 수 있습니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역량 접근법이란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 단순히 소득이나 형식적 기회가 있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즉 실질적인 가능성을 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he Capability Approach")

이 시각으로 보면 '왜 자격증을 안 따냐'는 질문 앞에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생깁니다. 그 아이에게 실제로 어떤 선택의 조건이 있었는가. 누군가는 부모의 지원 아래 2년을 준비할 수 있었고, 누군가는 당장 월급이 필요했습니다. 같은 기회처럼 보여도 실제 조건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센은 바로 그 차이를 보자고 말한 겁니다.

《다음 소희》가 묻는 것, 그리고 아렌트

《다음 소희》는 첫 직장이 끝이 아님을 훨씬 무겁게 보여줍니다. 특성화고 학생 소희는 현장실습을 통해 콜센터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취업이라는 문은 열렸지만 그 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영화를 보기 전엔 아무도 몰랐습니다.

영화는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 어떤 상사를 만나는가
  •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누가 보호해주는가
  •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들은 자격증이나 학점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취업을 '완성'으로 보는 시선이 얼마나 이른 결론인지를 소희가 보여줍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습니다. 노동이란 먹고 살기 위한 생존 활동이고, 작업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활동이며, 행위는 다른 사람들과 공적인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활동입니다. 아렌트에게 가장 인간다운 활동은 단순히 생계를 잇는 노동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에 가까웠습니다.

이 구분을 빌려오면 직장은 월급을 받는 장소 이상이 됩니다. 직장은 동료와 말을 주고받고, 내 몫의 일이 다른 사람의 일과 연결되는 경험을 하는 곳입니다. 사회 안에서 자기 역할을 처음으로 배우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작은 회사에 다닌다는 사실이 곧 삶이 작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안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저도 아직 이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자격증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더 나은 직장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여전히 있습니다. 그 마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마음과 함께 이제는 다른 사실도 붙들어두려 합니다. 자격증이 없다는 것과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다릅니다. 작은 회사에 다닌다는 것과 삶이 멈춰 있다는 것도 다릅니다. 석환에게는 초능력이 있었지만, 현실의 청년에게 필요한 힘은 어쩌면 죽었다 살아나는 능력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조금 더 버티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해가는 감각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첫 직장, 혹은 당신 곁에 있는 누군가의 첫 직장은 지금 어떤 이름으로 읽히고 있나요. 완성이라는 이름인가요, 아니면 시작이라는 이름인가요. 저는 이 질문을 아들에게, 그리고 저 자신에게 조금 더 오래 붙들고 있으려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1. 나는 자녀의 성장을 학력, 자격증, 직업, 연봉과 같은 눈에 보이는 성취로만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2. 지금 자녀가 자신의 첫 직장에서 배우고 있는 ‘삶의 기술’에는 무엇이 있을까?
  3. 자녀에게 내가 원하는 미래를 요구하기 전에,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참고 자료

  • 씨네21, 《부활남: 더 레드》 작품 정보 — 2026년 9월 30일 개봉, 31세 취업준비생 석환의 면접 실패와 부활 능력을 중심으로 한 작품 소개.
  • CINEPLAY, 「구교환, 31살 취업준비생 변신」 — 영화 속 석환의 취업준비생 설정과 영화의 기본 배경.
  • 연합뉴스, 「유쾌하고 영리한 성장 드라마…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 1995년을 배경으로 한 고졸 출신 말단 여성 직원들의 승진과 노동환경 이야기.
  • KBS 뉴스, 「고졸 여직원들의 통쾌한 성장극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 영화 속 학력에 따른 차별과 토익반 설정에 관한 작품 소개.
  • 영화진흥위원회, 2023년 영화산업 관련 자료 — 《다음 소희》의 개봉과 독립·예술영화 흥행 관련 정보.
  • 경향신문, 「영화 ‘다음 소희’ 본 특성화고 졸업생이 말하는 ‘지금 소희’」 — 영화가 현장실습과 노동환경의 구조적 문제를 다룬다는 설명.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istotle’s Ethics” — 에우다이모니아와 인간의 좋은 삶을 활동 및 탁월성의 관점에서 설명.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he Capability Approach” — 아마르티아 센의 역량 접근법, 실질적 기회와 삶의 가능성에 관한 설명.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annah Arendt” — 노동·작업·행위의 구분과 인간 활동의 의미에 관한 설명.

참고: https://namu.wiki/w/%EB%B6%80%ED%99%9C%EB%82%A8:%20%EB%8D%94%20%EB%A0%88%EB%93%9C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istotle-ethics/
https://plato.stanford.edu/entries/capability-approach/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end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