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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직장인데 왜 다니기 싫을까? 《소울》 × 빅터 프랭클 — 직업은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by cinema-1 2026. 8. 23.

조 가드너가 처음으로 무대에 섭니다. 그토록 원하던 재즈 클럽, 그토록 원하던 스포트라이트. 손끝이 건반을 두드리는 순간, 저는 그 장면에서 잠깐 호흡을 멈췄습니다. 당연히 여기서 영화가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꿈을 이뤘으니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그런데 픽사는 그 순간 이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이후'가 저를 한참 붙잡아 두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함께 들여다보는 글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같이 생각해보려 합니다.

꿈을 이루고 나서야 시작되는 질문

공연이 끝나고 조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기쁨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달랐습니다. "다음엔 뭘 하지?" 라는 물음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바라던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 그리고 그 자격증을 들고 첫 면접을 통과했을 때.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가라앉고 나면 또 다른 불안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목표를 이뤘는데도 왜 허전한 것인지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 감각을 목적론적 함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목적론(Teleology)이란 삶이나 행위에 특정한 목적과 방향이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여기서 함정이란, 그 목적 하나에 삶 전체의 의미를 걸어버리는 순간 생겨납니다. 목표에 도달하면 의미도 함께 소진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조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진짜였습니다. 하지만 '재즈 무대에 서는 것'과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같은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영화는 그 둘을 조심스럽게 분리합니다.

의미는 목표가 아니라 태도에서 온다

이 지점에서 저는 빅터 프랭클을 떠올립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후 인간이 어떻게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는지를 평생 연구했습니다. 그가 창시한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가 쾌락도, 권력도 아닌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라고 봅니다. 로고테라피란 '의미(Logos)'를 통해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는 접근법으로, 삶이 어떤 상황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출처: Viktor Frankl, 『Man's Search for Meaning』).

프랭클의 관점에서 보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읽힙니다.

  1.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동함으로써 — 일, 창작, 돌봄처럼 세상에 무언가를 내어놓는 행위
  2. 아름다움이나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 풍경 하나, 사람 하나에 감동받는 순간
  3.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떤 태도로 마주하느냐를 선택함으로써 — 상황이 아닌 반응을 선택하는 것

조 가드너는 첫 번째 경로, 즉 음악을 통한 의미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영화 중반, 이름 없는 영혼 22와 함께 땅으로 내려오면서 두 번째 경로를 조금씩 배워갑니다. 피자 한 조각의 맛, 낙엽이 손바닥에 내려앉는 감각. 소소하지만, 그것들이 모여 삶이라는 것을.

솔직히 처음엔 이 장면들이 그냥 귀엽게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퇴직 이후 일자리를 찾아다니던 어느 날, 불합격 문자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다 길가의 작은 꽃집 앞에서 멈춘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사지 않았습니다. 그냥 잠깐 서 있었을 뿐인데, 그날 하루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기억이 22가 감동받던 장면들과 겹쳤습니다.

 

 

영화 <소울>과 빅터 프랭클의 철학사상 이미지1

 

좋은 직장과 좋은 삶 사이에서

 

아들이 정규직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안도했습니다. 월세 지원에 근속 인센티브까지 있는 조건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들은 계속 다니기 싫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 때문이었을 겁니다. 공공일자리, 기간제 업무, 미세먼지 감시원, 경제총조사. 일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몸으로 배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들의 불만이 사치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아들의 삶을 걱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삶을 아들에게 권하고 있는 것인가.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전자는 아들을 중심에 놓고, 후자는 저를 중심에 놓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직업 문제에 개입할 때 이 두 질문이 얼마나 자주 뒤섞이는지, 그 날 밤 처음 제대로 들여다봤습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는 철학적 입장이 있습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본질이나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사상입니다. 장폴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우리가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출처: Jean-Paul Sartre,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이 관점을 아들에게 적용하면, 부모가 제시하는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아들의 의미 있는 선택이 되려면 아들 스스로가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부모가 대신 정해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질문을 조금 바꿔보고 있습니다.

  • "왜 그만두려고 해?" 대신 → "무엇이 그렇게 힘들어?"
  • "그만두면 어떻게 하려고?" 대신 → "네가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이야?"
  • "이 조건이면 충분하지 않아?" 대신 → "이 일이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봤어?"

물론 이것이 아들의 어떤 선택이든 다 맞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책임, 생활비, 경력의 흐름, 이런 것들도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선택은 단순히 싫은 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향해 가고 싶은지를 알고 내린 선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방향을 찾는 일은 부모가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면서 계속 마음에 걸린 문장이 있습니다.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으며 남긴 말입니다. "인간에게 무엇이든 빼앗을 수 있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 아들이 지금 직장을 다니든 그만두든, 그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로 자신의 삶을 마주하고 있는가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퇴직 후 새 출발을 시작하는 저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소울》은 꿈을 이루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꿈을 이루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질문을 담은 이야기였습니다. 조가 그 질문 앞에 선 것처럼, 저도 아들도 지금 각자의 방식으로 그 앞에 서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당장 답을 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질문을 잊지 않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소울>과 빅터 프랭클의 철학사상 이미지2

 

 

함께 생각해볼 질문

 

  • 좋은 직장의 조건과 내가 원하는 삶의 조건은 반드시 같을까요?
  • 자녀에게 안정적인 삶을 권하는 것과 자녀의 삶을 대신 결정하는 것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 직업이 사라진다면, 나는 무엇에서 삶의 의미와 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참고: https://namu.wiki/w/%EC%86%8C%EC%9A%B8(%EC%95%A0%EB%8B%88%EB%A9%94%EC%9D%B4%EC%8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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