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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한 아이의 꿈까지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길가메시의 꿈》 × 알베르 카뮈

by cinema-1 2026. 9. 9.

"시지프는 행복했을 것이다." 카뮈가 이 한 문장을 썼을 때, 저는 처음엔 그게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평생 바위를 굴려 올리고 또 굴러 내려오는 걸 반복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니요. 그런데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폐막식이 끝나고 혼자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그 문장이 갑자기 다르게 읽혔습니다. 그날 본 영화 때문이었습니다.

티그리스 강가에서 아이가 바라본 것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의 초반부, 아홉 살 소년 춤춤이 강가에 쪼그려 앉아 물 위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이의 눈은 강물이 아니라 강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습니다. 감독 모하메드 알 다라지는 그 시선을 카메라로 쫓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의 등을 오래, 천천히 담습니다.

저는 그 등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가 강 너머 저승을 상상하는 장면인데, 이상하게 슬프기보다 단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춤춤이 믿는 것은 이렇습니다. 티그리스강 어딘가에 저승 이르칼라로 향하는 문이 숨어 있고, 그 문을 찾으면 길가메시의 전설처럼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에서 길가메시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 이후 불멸을 찾아 세상 끝까지 걸어갑니다. 4,000년 전의 왕이 품었던 질문을 전쟁 속 아홉 살 아이가 다시 품고 있는 겁니다.

영화가 이 신화를 끌어오는 방식이 영리합니다.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이가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하루를 살아갑니다.

여기서 저는 신화적 사고(Mythological Thinking)라는 개념을 떠올렸습니다. 신화적 사고란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온 서사 체계를 의미합니다. 고대인들이 번개를 신의 분노로 해석했던 것처럼, 춤춤의 길가메시 믿음도 설명할 수 없는 상실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시도입니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한 언어입니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는 절망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자연스럽게 알베르 카뮈가 생각난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전쟁이라는 배경은 카뮈 철학의 핵심 개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Absurdity)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와 질서를 원합니다. 그런데 세계는 그 요구에 침묵합니다. 이 충돌 자체가 부조리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착하게 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기대와,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가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는 현실 사이의 간극. 그 설명되지 않는 간격이 부조리입니다.

카뮈는 여기서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1. 육체적 자살 —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
  2. 철학적 자살 —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의탁해 부조리를 외면하는 것
  3. 반항(Revolt) — 부조리를 정면으로 인정하면서도 삶을 계속 선택하는 것

카뮈는 세 번째를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반항이란 큰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결심입니다(출처: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춤춤의 길가메시 꿈이 정확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전쟁으로 사라진 현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강가에 앉아 문을 찾습니다. 그 꿈이 현실을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어쩌면 아이도 어렴풋이 압니다. 하지만 그 꿈 때문에 내일로 걷습니다. 저는 그것을 카뮈적 반항으로 읽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이 영화가 판타지로 흘러가면 어떡하나 걱정했습니다. 신화적 상상력이 현실의 고통을 가리는 도피처가 되는 영화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알 다라지 감독은 그 선을 넘지 않습니다. 꿈은 꿈이고, 전쟁은 전쟁입니다. 그 둘이 공존한다는 게 이 영화의 정직함입니다.

 

 

영화 <길가메시의 꿈>과 알베르까뮈의 철학사상 이미지

 

 

폐막식 밤, 혼자 집으로 걷던 길

제가 이 영화를 본 것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폐막식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지인들은 각자 일정이 있었고, 저는 혼자 자리를 잡았습니다. 실업 상태인 지금, 솔직히 말하면 평일 이른 저녁에 영화관에 앉아 있는 게 처음엔 어색했습니다. 직장이 있을 때는 그런 시간이 사치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이상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무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 정리된 느낌이었습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이 먼저 세상에 던져진 뒤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을 때, 이 말은 우리에게 미리 정해진 역할이나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자유입니다. 지금 제 상황도 그렇게 읽힐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재취업이 언제 될지 모릅니다. 귀촌이 잘 될지도 모릅니다. 텃밭의 작물이 제대로 자랄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그 영화가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냈고, 저는 집으로 걸어오면서 그 질문을 씹었습니다. 이게 의미 있는 하루인지 아닌지, 누가 판단해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서 뭔가 움직인 건 사실입니다.

이번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국제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한 '길가메시의 꿈'은 로카르노영화제 피아짜 그란데 야외 대형 스크린에서 상영한 유명한 섹션입니다. 이 섹션에 선정된다는 것은 작품이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의도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출처: 로카르노영화제 공식 웹사이트). 알 다라지 감독이 이라크독립영화센터를 통해 독립 영화인들을 지원해온 이력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예술 영화 관객만을 위한 작품이 아니었을 겁니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다양한 자리에서 볼 수 있기를 원했을 겁니다.

영화가 저에게 닿은 건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은 전쟁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말을 겁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이 있는지
  • 계획이 완전히 어긋난 적이 있는지
  • 그래도 다음 날 눈을 뜬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 세 질문은 세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마흔 넘어 직장을 잃은 사람도,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고 방향을 잃은 이십 대도, 인생2막을 준비하는 60대도 같은 자리에서 이 질문을 받습니다.

폐막식이 끝난 뒤 걸어오던 길이 아직 기억납니다. 어둡지 않았습니다. 가로등이 충분했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어폰 없이 걸었습니다. 주변 소리를 그냥 들으면서요.

카뮈는 인간의 위대함을 "불행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불행 속에서도 다시 걷는 능력"에서 찾았습니다. 춤춤이 강가에서 꿈을 꾼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강가에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독자 여러분도 한번 꺼내보셨으면 합니다. 지금 내 삶에서 내일을 살게 하는 작은 이유 하나는 무엇인가.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낸 것.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대답입니다.

 

생각해볼 질문

  • 나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힘든 것일까, 아니면 삶에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든 것일까?
  • 지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계속 살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동은 무엇일까?
  • 내 삶에서 매일 다시 밀어 올리고 있는 ‘시지프의 바위’는 무엇일까?
  •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인간이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오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 지금 내 삶에서 ‘작은 희망’ 하나를 찾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 이 글은 영화 감상과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작성한 개인적인 에세이입니다. 철학자의 사상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이해하기 쉽게 해석한 부분이 있으며, 특정 철학자의 견해 전체를 대신하는 글은 아닙니다.


참고: https://jimff.org/kor/addon/00000001/program_view.asp?QueryStep=2&QueryType=B&QueryYear=2026&c_idx=595&utm_source=chatgp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