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신 모로가 산을 등에 태우고 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람을 가르는 흰 늑대의 발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 저는 리모컨을 내려놓았습니다. 1997년에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웅장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면서는 달랐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멈춰,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원래부터 인간 바깥에 있던 것인가." 마침 며칠 전 미세먼지 점검원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다시 쓰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지원동기 칸을 채우면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는 걸,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자가 경고한 것과 에보시가 선택한 것
타타라 마을의 대장장이 에보시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나병 환자를 거두고,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줍니다. 그가 숲을 베는 건 탐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선택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불편합니다. 악인이 없는데도 세계가 무너져가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이 상황을 이미 2,500년 전에 예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무위자연이란 자연의 흐름에 억지로 개입하거나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게으르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연에는 이미 스스로 작동하는 질서가 있으니, 인간이 그것을 억지로 꺾으려 할 때 오히려 더 큰 균열이 생긴다는 경고입니다.
『도덕경』 25장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며,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이 구절은 인간이 자연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자연이라는 거대한 질서 안에 포함된 존재임을 뜻합니다(출처: 노자, 『도덕경』 25장, 국립중앙도서관 원문자료).
에보시의 선택은 이 질서를 거스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결과를 직접 보여줍니다. 숲의 신 시시가미가 무너지고, 숲이 죽고, 마을도 함께 위협받습니다. 자연을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인간도 버티지 못하는 환경이 찾아옵니다.
저는 올여름 텃밭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잡초가 자라는 것이 보기 싫어서 비닐을 깔고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폭염이 오자 비닐 안은 더 빠르게 달아올랐고, 정성들여 심은 모종들이 먼저 말라 죽었습니다. 억지로 씌운 비닐 바깥, 아무도 돌보지 않은 풀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노자의 말이 텃밭에서 증명된 셈이었습니다.
서양 철학 쪽에서 비교하자면,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로 자연을 인간이 탐구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습니다. 베이컨이 말한 지배란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바꿔가는 것이었습니다. 에보시의 철학이 정확히 이것입니다. 반면 노자는 그 반대편에 섰습니다. 노자가 보기에 자연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 속한 질서입니다. 《프린세스 모노노케》는 베이컨이 아닌 노자 쪽 손을 들어줍니다. 그것도 매우 조용하게.

아시타카가 서 있던 자리, 제가 서 있는 자리
주인공 아시타카는 인간 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숲의 신들 편도 아닙니다. 그는 그 경계선 위에 서 있습니다. 처음엔 그게 우유부단하게 보였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왜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원서를 쓰면서 다르게 읽혔습니다. 면접에서 "새로운 동료들과 갈등 없이 지낼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말이 막혔습니다. 환경을 지키는 일이 인간을 배제한 채로 가능하지 않다는 걸 그 순간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현장에도 관계가 있고, 갈등이 있고, 타협이 있습니다. 아시타카가 경계 위에 선 이유가 비로소 납득됐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선과 악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이야기"라고 밝혔습니다(출처: 스튜디오 지브리 공식 아카이브 인터뷰). 그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은 20대에게도 유효하고, 제 나이에도 여전히 무겁습니다.
노자 철학에는 또 하나의 개념이 있습니다. 조화(和)입니다. 조화란 서로 다른 것들이 대립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말합니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겨서는 안 됩니다. 아시타카가 숲과 인간 사이에서 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미세먼지 점검원 일에 다시 지원한 이유도 이와 닿아 있습니다. 계약직이라는 현실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나이도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환경을 지키는 일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는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거창한 사명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오늘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공존을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 가까운 거리는 차 대신 걸어보기
- 일회용 포장을 한 번 더 생각하기
- 분리배출을 조금 더 꼼꼼하게 하기
- 미세먼지 농도를 하루 한 번 확인하는 습관 들이기
- 창밖의 나무 하나를 계절마다 관심 있게 바라보기
이것들이 지구를 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을 나 바깥의 것으로 보지 않는 태도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프린세스 모노노케》는 끝내 화해를 보여줍니다. 완전한 해결이 아닙니다. 숲은 다시 천천히 자라기 시작하고, 인간은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영화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노자도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완전한 지배도, 완전한 포기도 아닌,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도(道)라고.
도(道)란 만물이 흘러가는 근원적인 원리이자 길을 뜻합니다. 노자에게 도는 인간이 만든 규칙이 아니라, 자연 안에 이미 깔려 있는 질서입니다. 그 길 위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니라 함께 걷는 존재입니다.
저는 지원서 지원동기 칸에 결국 이렇게 썼습니다. "자연이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문장이 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질문을 지금 독자분께도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자연은 바깥에 있는 풍경입니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숨 쉬는 공기 그 자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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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E》 × 아르네 네스 → 환경을 지키는 것은 인간만을 위한 일일까
《투모로우》 × 한스 요나스 → 미래 세대에게 우리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퍼펙트 스톰》 × 노자 →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있을까
생각해볼 질문
- 나는 자연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 오늘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환경 보호는 무엇일까?
-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가장 먼저 바꿔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