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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미래를 망치면서도 멈추지 못할까─ 《설국열차》 × 한스 요나스의 책임 윤리

by cinema-1 2026. 6. 8.

이 질문 앞에서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한스 요나스는 "미래 세대를 향한 책임"을 윤리의 핵심에 놓았고, 노자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려 할수록 오히려 파국에 가까워진다"고 경고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다른 언어처럼 들리지만, 《설국열차》의 얼어붙은 세계 앞에 서면 두 목소리가 기묘하게 겹쳐집니다. 그 충돌과 공명이,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멈추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감독이 숨긴 철학적 코드 — 달리는 기차는 왜 멈추지 못하는가

봉준호 감독은 기차라는 공간을 단순한 배경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 설국열차는 멈추는 순간 죽음을 의미합니다. 달리는 것 자체가 생존의 조건이죠. 이 설정이 저는 처음부터 섬뜩했습니다. 기차가 멈출 수 없다는 것은, 현대 문명이 성장과 소비를 멈출 수 없다는 메타포(metaphor), 즉 영화적 은유와 정확히 겹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시작은 아이러니합니다. 인류는 지구 온난화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대기 중에 냉각 물질 CW-7을 살포합니다. 결과는 통제 불능의 빙하기였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다 더 큰 재앙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측면에서도 이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광활하게 얼어붙은 지구의 풍경이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동안, 기차 안은 여전히 따뜻하고 분주합니다. 바깥의 죽음과 안의 생존이 유리 한 장으로만 구분됩니다. 그 유리가 얼마나 얇은지를, 관객은 내내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더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재앙 이후에도 인간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를 구조화했다는 점입니다. 앞칸의 호화로움과 꼬리칸의 결핍. 환경 재앙이 계급 구조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이 내러티브(narrative) 구조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우리는 정말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가?"

동양 사상으로 읽기 — 노자와 장자가 본 기술 오만

도교 철학의 핵심 개념인 무위(無爲)를 이 영화 앞에 놓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무위란 억지로 하지 않음,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 머무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이라 했습니다. 학문을 쌓을수록 더하고, 도를 따를수록 덜어낸다는 뜻입니다. 현대 문명은 끊임없이 더하는 방향으로 달려왔습니다. 기술을 더하고, 편리함을 더하고, 소비를 더했습니다. CW-7 살포는 바로 그 '더함'의 극단적 결과입니다.

장자 역시 인간의 기술 개입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는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은 기계에 의존하는 마음이 생기고, 결국 기계적인 삶을 살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혐오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 자체가 왜곡된다는 경고입니다. 설국열차 안의 인간들은 자연 없이 기차라는 인공 환경 속에서만 생존합니다. 장자가 우려한 그 세계가 영화 속에서 문자 그대로 구현된 셈입니다.

동양 사상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천인합일이란 하늘(자연)과 인간이 본래 하나이며,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 질서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유입니다. 유교와 도교 모두 이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설국열차의 세계는 천인합일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입니다. 자연은 사라졌고, 인간은 인공의 궤도 위에서만 존재합니다. 이 장면들을 보다 보면, 천인합일의 파국이 단지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양 사상으로 읽기 — 한스 요나스와 책임 원칙이 충돌하는 지점

서양 철학의 흐름에서 한스 요나스는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는 현대 기술 문명이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위험을 만들었다고 보았습니다. 과거의 윤리는 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다뤘습니다. 하지만 핵, 유전자 조작, 기후 변화처럼 수백 년 후 인류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기술 앞에서, 그 윤리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요나스가 『책임의 원칙(Das Prinzip Verantwortung)』에서 제시한 핵심 명제는 이것입니다. "인류가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이것을 요나스는 공포 발견술(Heuristik der Furcht)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합니다. 공포 발견술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먼저 상상하고, 그 가능성만으로도 행동을 억제해야 한다는 사유입니다. 좋은 결과를 낙관하기보다 나쁜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이 책임 있는 태도라는 것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이 개념을 영화에 대입하면 CW-7 살포는 공포 발견술의 완전한 실패입니다. 인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충분히 상상하지 않은 채, 기술적 해결책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빙하기로 돌아왔습니다.

 

설국열차와 한스 요나스의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 이미지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이 이 지점에서 만나는 방식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노자의 무위는 "하지 말라"는 소극적 금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연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적극적 지혜입니다.
  • 요나스의 책임 원칙은 "미래를 고려하라"는 적극적 명령이지만, 결국 기술의 자만을 억제하라는 점에서 무위와 방향이 겹칩니다.
  • 천인합일과 책임 원칙은 모두 인간이 자연 혹은 미래 세대와 단절될 수 없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표현 방식과 출발점은 다르지만, 설국열차라는 디스토피아 앞에서 두 사상은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세먼지 민간점검원으로 일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역 곳곳을 다니며 불법 소각을 계도하고, 미세먼지 발생 현장을 기록했습니다. 작은 일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요나스가 말한 책임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느꼈습니다. 거대한 제도 변화만이 아니라, 지금 이 현장에서 한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하는 것, 그것이 책임의 시작이라는 것을요. 계약이 끝난 뒤에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영화 정보).

《설국열차》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칸에 앉아 있느냐고. 그리고 그 기차가 향하는 곳을 알면서도, 멈출 생각이 있느냐고. 노자도 요나스도, 멈추지 못하는 것이 문명의 본성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철학을 남긴 이유는, 그 본성에 맞서는 사유가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금 우리의 선택은, 다음 세대가 어떤 창문 너머를 보게 될지를 결정합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철학 영화 이야기

 

1️⃣ 《월-E》 × 장 보드리야르
→ 우리는 왜 이미지를 소비하게 되었을까

2️⃣ 《퍼펙트 데이즈》 × 스토아 철학
→ 평범한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

3️⃣ 《브이 포 벤데타》 × 미셸 푸코
→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을까

 

생각해볼 질문


나는 미래 세대를 고려하며 소비하고 있는가?
기술 발전은 정말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가?
환경 문제 앞에서 개인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할까?


참고: https://namu.wiki/w/%EC%84%A4%EA%B5%AD%EC%97%B4%EC%B0%A8(%EC%98%81%ED%99%9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hans-jonas/
https://www.kobis.or.kr/kobis/business/mast/mvie/searchMovieList.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