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되면 TV와 휴대폰 화면이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날 광고로 가득 찹니다. 저도 그 화면들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우리 집도, 이웃집도, 귀농교육에서 만난 그 중국 분도, 다들 영화 속 완득이네 가족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고요.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 아래 완득이라는 영화가 새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성선설과 인(仁)으로 읽는 완득이의 분노
완득이를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그저 사춘기 반항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녀를 키우면서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읽혀야 하는 영화였습니다. 화를 내고 관계를 끊고 혼자 방 안에만 있는 아이의 모습이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었거든요.
공자 철학의 핵심 개념인 인(仁)은 보통 '착함' 정도로 번역되지만, 실제 의미는 그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여기서 인(仁)이란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여는 능력, 즉 관계를 통해 인간다움을 완성해가는 과정 자체를 가리킵니다. 공자는 인간을 독립된 원자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망(關係網) 안에서만 완성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관계망이란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친구 사이에 형성되는 유기적 연결 구조를 말합니다.
완득이의 분노는 이 관계망이 처음부터 훼손된 데서 출발합니다. 장애를 가진 아버지, 외국인 노동자 출신 어머니, 반복되는 경제적 결핍. 이 조건들은 완득이를 관계망 바깥으로 밀어냈고, 그 결과 완득이는 세상을 먼저 밀어내는 방식으로 자신을 방어했습니다. 상처받기 전에 먼저 화를 내는 것, 이게 완득이의 생존 방식이었던 겁니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해석 틀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성선설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악한 행동은 그 본성이 환경에 의해 억눌린 결과라는 관점입니다. 맹자는 이를 사단(四端)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서 사단이란 측은지심(惻隱之心,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잘못에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양보할 줄 아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네 가지 도덕적 싹을 말합니다. 이 네 가지가 완득이 안에도 살아 있었기에, 담임 동주의 끈질긴 관계 시도가 결국 씨앗에 물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완득이의 성장 과정에서 주목할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동주 선생의 지속적 관계 시도 → 완득이가 먼저 쌓은 벽이 서서히 허물어짐
- 아버지의 장애를 수용하는 과정 → 측은지심이 수치심을 이겨내는 순간
- 어머니를 받아들이는 결말 → 억눌렸던 사단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장면
- 격투기라는 통로 → 공격성을 승화시키는 사회적 기제(機制) 역할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본 건 귀농교육 과정에서 중국 국적의 여성분이 한국 남성과 결혼해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나서입니다. 그분의 아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적응할지 자연스럽게 걱정이 됐고, 그제야 완득이의 처지가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의 현실로 읽혔습니다.
관계회복과 오늘 우리 가족의 현실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미취업 상태의 자녀가 집 안에서 가족과도 소통을 끊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부모가 느끼는 무력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해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당사자는 전혀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완득이와 그 아버지 사이의 간극과 정확히 겹쳐 보였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4.5%를 넘어섰고, 이혼 건수도 꾸준히 유지되며 가구 구조 자체가 빠르게 다원화되고 있습니다(출처: 통계청). 완득이네처럼 '비정형 가족'이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비정형 가족이란 혈연·혼인·입양으로 구성된 전통적 핵가족 모델에서 벗어난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 조손 가정 등을 통틀어 부르는 사회학적 용어입니다.
여성가족부의 2023년 다문화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다문화 자녀 중 학교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느끼는 비율이 여전히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여성가족부). 제가 귀농해 내려온 지방에서는 외국인 기숙사를 따로 지어 이주 노동자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모습도 직접 봤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물리적 환경을 갖춰주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완득이가 정작 필요했던 것은 시설이 아니라 동주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 역할과 책임의 의미는
[국제시장 × 공자 글]
👉 상처받은 인간의 성장 이야기는
[굿윌헌팅 × 주희 성리학 글]
👉 사회 구조와 차별의 문제는
[기생충 × 롤스 정의론 글]
저도 자녀와 함께 전철과 버스를 타고 나들이를 시도했습니다. 처음에는 말 한마디 없이 창밖만 봤는데, 그 침묵 속에서 아이가 조금씩 세상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관계회복은 대화가 아니라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걸,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사회적 유대(社會的 紐帶), 즉 개인이 타인과 맺는 심리적·정서적 연결의 강도가 자존감과 회복탄력성(回復彈力性)에 직접 영향을 준다는 것은 사회심리학에서 이미 오래전에 증명된 사실입니다. 여기서 회복탄력성이란 역경이나 실패 이후 다시 일어나는 심리적 반등 능력을 말합니다.
요즘 청년들이 화를 내다 이제는 아예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현실도, 결국 관계망이 끊기면서 사단이 작동할 기회 자체를 잃어버린 상태라고 저는 봅니다. 과도한 경쟁, 임금 양극화, 반복되는 취업 실패. 이 구조적 문제들이 완득이의 가정환경처럼 개인의 인(仁)을 짓누르고 있는 겁니다.
완득이는 결국 관계 속에서 살아났고, 저희 아이도 지금 조금씩 세상 쪽으로 걸어 나오는 중입니다. 하루아침에 달라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맹자가 말한 것처럼 선한 씨앗은 이미 그 안에 있다는 것,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관계를 옆에서 유지해주는 것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가정의 달 5월, 완득이라는 영화가 단순한 청소년 성장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 생각해볼 질문
나는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누군가를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는 말은 내 삶에서 어떤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