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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같은 산업재해는 반복되는가─ 《다음 소희》 × 한나 아렌트

by cinema-1 2026. 6. 9.

사람이 죽는 일에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익숙해졌을까요. 컨베이어 벨트에 사람이 끼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저는 잠시 멈췄습니다. 충격 때문이 아니라, 충격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그 무감각이 더 무서웠습니다. 영화 《다음 소희》는 바로 그 무감각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불교의 연기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무도 악인이 아닌데, 왜 한 사람은 무너졌을까

영화 속 소희의 하루는 겉으로 보면 평범합니다. 출근하고, 실적을 채우려 애쓰고, 감정을 억누르며 전화를 받습니다. 소희를 망가뜨리는 사람은 따로 없습니다. 관리자는 그저 수치를 관리하고, 학교는 취업률을 신경 쓰고, 회사는 계약을 유지합니다. 각자 자기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 장면들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이상하게 아이히만 재판 기록이 떠올랐습니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지켜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괴물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습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극단적인 악은 잔혹한 의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멈춘 채 조직의 논리에 복종하는 평범한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사유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아이히만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고, 영화 속 관리자들도 시스템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서 아렌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사유의 부재'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는 것. 그것이 평범한 사람을 가해자로 만든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영화 다음 소희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미지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저는 동양 철학과 겹쳐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연기론이란 모든 현상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수많은 조건과 관계 속에서 서로 의존하며 발생한다는 사유입니다. 소희의 죽음은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현장실습 구조, 취업률 경쟁, 성과 중심 사회, 계약 관계, 개인의 무감각이 모두 얽혀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연기론의 시각에서 보면 이 비극에는 '단일한 원인'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원인이고 모든 것이 결과입니다.

아렌트가 개인의 사유 부재를 지적했다면, 연기론은 구조 전체의 공모를 드러냅니다. 두 사유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 인간은 숫자가 되고, 왜 우리는 그것을 멈추지 못했을까

영화에서 소희의 실적은 숫자로 표시됩니다. 그 숫자가 낮으면 압박이 오고, 높으면 더 높은 목표가 주어집니다. 소희라는 인간은 점점 지워지고, 통계 속 하나의 단위만 남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멈칫했습니다. 저 역시 현장 일을 하며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며칠이 지나면 익숙해집니다. "다들 이렇게 하니까"라는 말이 경계심을 조용히 무너뜨립니다. 아렌트의 말처럼 사유가 멈추는 순간입니다.

서양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구조는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Entfremdung), 즉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인간적 본질로부터 분리되는 현상과도 닿아 있습니다. 소외란 단순히 힘든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과정에서 인간이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소희는 하루하루 그 과정을 겪습니다.

동양 사상에서는 유교의 인(仁) 개념이 정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인이란 타인을 나 자신처럼 여기는 마음, 관계 안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태도입니다. 공자는 인을 개인의 덕목이자 사회적 실천으로 보았습니다. 소희가 처한 구조는 정확히 인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시스템에는 타인을 나처럼 느끼는 마음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동서양 사상이 이 영화를 읽는 서로 다른 언어라면, 비교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한나 아렌트(서양): 사유를 멈춘 개인의 복종이 구조적 악을 가능하게 만든다.
  2. 불교 연기론(동양): 비극은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수많은 조건의 얽힘 속에서 발생한다.
  3. 마르크스(서양): 인간이 생산 수단으로 환원될 때 소외가 시작된다.
  4. 유교의 인(仁, 동양): 타인을 숫자가 아닌 인간으로 바라볼 때만 이 구조에 균열이 생긴다.

《다음 소희》는 이 네 가지 시선을 동시에 요구하는 영화입니다. 반복되는 산업재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이 작품은 국내에서 36만여 명의 관객을 모았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하지만 제가 더 주목하는 수치는 따로 있습니다. 고용노동부 자료 기준으로 매년 수백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합니다. 그 숫자 하나하나가 소희입니다.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유하고 있는가. 소희의 이야기를 보면서 잠깐 마음이 무거워지다가, 다음 날이면 잊는 것이 아렌트가 경고한 바로 그 무감각은 아닐까요. 불교의 연기론이 옳다면 소희의 죽음은 누군가 한 명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 구조 안에 얽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변화 역시 그 구조 안의 모두에게서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스템보다 인간을 먼저 보는 것, 그것이 아렌트가 말한 사유의 회복이고, 유교가 말한 인(仁)의 출발점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철학 영화 이야기

 

1️⃣ 《모던 타임즈》 × 마르크스
→ 왜 인간은 기계처럼 일하게 되었을까

2️⃣ 《퍼펙트 데이즈》 × 스토아 철학
→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는 법

3️⃣ 《설국열차》 × 한스 요나스
→ 기술 문명은 왜 인간을 위험하게 만드는가

 

생각해볼 질문


반복되는 산업재해는 정말 개인 실수의 문제일까?
우리는 노동자를 인간으로 보고 있는가, 생산 수단으로 보고 있는가?
효율이 인간보다 우선되는 사회는 결국 누구를 위한 사회일까?


참고: https://namu.wiki/w/%EB%8B%A4%EC%9D%8C%20%EC%86%8C%ED%9D%AC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endt/
https://www.kobi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