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왕보다 먼저 인간을 본 사람들 —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보는 맹자의 인간 철학

by cinema-1 2026. 5. 16.

✔️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왜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 영화가 아닌지
맹자의 측은지심과 인간 철학이 무엇인지
인간은 왜 약한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지
권력을 잃은 뒤에도 남는 인간다움은 무엇인지
공동체와 관계가 인간에게 중요한 이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청령포에 처음 갔을 때 단종의 이야기가 그렇게 가슴에 꽂힐 줄 몰랐습니다. 영월에 혼자 내려간 남편을 생각하며 걸었던 그 길에서, 저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던지는 질문이 결코 역사 이야기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권력을 잃은 인간, 관계를 잃은 인간이 어떻게 다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지, 맹자의 철학과 제 삶의 이야기로 풀어봅니다.

자청한 유배, 그 외로움의 무게

남편이 영월로 지방근무를 자청했을 때, 저는 처음엔 그저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도시의 경쟁적인 생활, 해결되지 않은 자녀 문제, 가정 안에서 쌓인 긴장감. 어쩌면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거리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영월에는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가 있습니다. 정치적 희생양으로 끌려온 단종과 스스로 내려간 남편은 처지가 전혀 다르지만, 제가 단종의 무덤이 있는 장릉을 걸으며 느낀 것은 묘하게 닮은 쓸쓸함이었습니다. 둘 다 어떤 의미에서는 '관계의 바깥'에 놓여 있었으니까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왕좌에서 내려온 단종은 더 이상 두려운 권력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밥 한 끼가 그리운,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필요한 인간에 가까워집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약해질수록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점입니다.

맹자는 이 현상을 성선설(性善說)로 설명합니다. 성선설이란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며, 외부의 억압이나 욕심이 그것을 가릴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권력이라는 껍데기가 벗겨졌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 안의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제 경험상 이건 꽤 정확한 관찰입니다. 남편도 몸을 다쳐 도시로 올라왔을 때, 처음으로 가족이 그를 역할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니까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와 맹자의 측은지심의 철학 이미지

 

측은지심,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었습니다

맹자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측은지심(惻隱之心)입니다. 측은지심이란 타인의 고통을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마음이 흔들리는 감정, 즉 연민의 본능을 가리킵니다. 맹자는 이것이 학습이나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난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이 개념을 책에서 먼저 배웠지만, 실제로 체감한 건 자녀가 지방으로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도시에서 홀로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던 아이가 결국 엄마를 찾아 내려온 것, 그건 어떤 논리보다 먼저 작동한 감정이었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마음이 움직였고, 그 움직임이 관계를 다시 잇는 첫 걸음이 되었습니다.

영화 속 엄흥도라는 인물도 그렇습니다. 그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로,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졌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을 합니다. 맹자는 이런 행동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인(仁)'의 발현으로 설명합니다. 인(仁)이란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공동체 윤리의 출발점입니다. 엄흥도의 행동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외로운 인간을 외면하지 못한 본능적 반응이었습니다.

한국심리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목격할 때 자신이 직접 고통받는 것과 유사한 신경 반응을 보입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맹자가 수천 년 전에 철학으로 정리한 내용이 현대 신경과학으로도 뒷받침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측은지심이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맹자 철학에서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측은지심(惻隱之心): 타인의 고통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연민의 마음
  • 수오지심(羞惡之心): 잘못된 행동에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 사양지심(辭讓之心):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 아는 겸손의 마음
  •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양심

이 네 가지를 사단(四端)이라 부르는데, 사단이란 인간다움의 네 가지 실마리라는 뜻입니다. 맹자는 이 실마리가 끊기지 않도록 관계와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라고 보았습니다.

 

👉 부모도 한때는 꿈 많던 청춘이었다
[수상한 그녀 × 공자 · 베르그송 철학]

👉 말없는 사랑은 왜 가장 오래 기억될까
[집으로... × 공자 · 노자 철학]

👉 사람은 왜 관계 속에서 성장할까
[완득이 × 공자 · 맹자 철학]

회피한 관계, 다시 잇는 용기

솔직히 저도 한동안은 회피가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등이 있는 관계에서 멀어지면 고통도 줄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도 그랬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리가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습니다. 영월에 있는 동안 남편은 산악자전거를 타고 테니스를 치며 바쁘게 지냈지만, 몸이 다치자 결국 도시로 올라왔습니다. 회피의 끝에는 결국 관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맹자는 공동체론(共同體論)을 통해 인간은 관계 밖에서는 완전해질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공동체론이란 개인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만 온전한 인간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인간을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로 규정합니다. 단종이 유배지에서도 마을 주민들과 관계를 맺으며 버텼던 것처럼, 인간은 극한의 고독 속에서도 관계의 실마리를 놓지 않으려 합니다.

통계청의 사회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힘들 때 의지하는 대상 1위는 여전히 가족입니다(출처: 통계청). 디지털 연결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결국 인간이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곳은 가장 가까운 관계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귀농귀촌을 함께 준비하다 다른 지역으로 교육을 받으러 떠난 것이 처음엔 또 다른 회피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번은 조금 다릅니다. 무언가 준비하고 돌아오려는 방향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다시 잇는 데 필요한 것은 거창한 화해나 완벽한 이해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단종과 엄흥도처럼, 말보다 먼저 옆에 있어주는 것. 서로 부딪히고 갈등하면서도 관계를 끊지 않는 것. 그것이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의 실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배려는 오히려 관계를 더 뒤틀 수 있지만, 서로가 조금씩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그 틈에서 관계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권력을 잃든, 역할을 잃든, 지위를 잃든 인간에게 남는 것은 결국 관계입니다. 영화가 묻는 것도, 맹자가 말한 것도, 제가 장릉과 청령포에서 느낀 것도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혼자 완성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회피해온 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를 향해 한 발짝 다시 내딛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 생각해볼 질문

 

우리는 사람을 먼저 ‘지위’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을 잃고도 남는 인간다움은 무엇일까?
인간은 왜 끝까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일까?


참고: https://ethos34.co.kr/entry/%EC%A4%91%EC%9E%A5%EB%85%84-%EC%98%81%EC%9B%94-%EC%97%AC%ED%96%89-%EC%B2%AD%EB%A0%B9%ED%8F%AC-%EC%9E%A5%EB%A6%89-%EC%99%95%EA%B3%BC%EC%82%AC%EB%8A%94%EB%82%A8%EC%9E%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