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60년대생 장녀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름 석 자보다 '가족의 기둥'이라는 무거운 배역을 먼저 부여받는 일이었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를 대신해 동생들을 건사하며 청춘을 보냈고, 결혼 후에는 시댁이라는 견고한 가부장적 울타리 안에서 '며느리'와 '아내'로서의 돌봄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나만의 삶"은 언제나 저 멀리 있는 사치스러운 신기루 같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발표한 '지역사회 통합돌봄(커뮤니티 케어) 서비스' 소식을 접하며 묘한 감회에 젖었습니다. 평생 개인의 희생으로만 치부되었던 '돌봄'의 가치가 이제야 국가의 책임으로, 우리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정책에 투영되기 시작한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그 헌신들은, 심리학자 캐럴 길리건(Carol Gilligan)이 말한 '배려 윤리'의 정수였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영화 <작은 아씨들> 속 자매들의 연대와 길리건의 철학을 통해, 30년 넘게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던 제가 이제야 비로소 '나를 돌보는 텃밭'으로 나아가는 이 실존적 여정을 기록해보려 합니다.
캐럴 길리건이 말하는 '다른 목소리'란 무엇인가
심리학자 캐럴 길리건(Carol Gilligan)은 1982년 《다른 목소리로(In a Different Voice)》라는 책에서 기존 도덕 발달 이론에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당시 로렌스 콜버그로 대표되는 주류 심리학계는 추상적인 정의와 보편적 원칙을 지키는 것을 도덕 발달의 최고 단계로 봤습니다. 여기서 '정의의 윤리(ethics of justice)'란 개인의 권리와 공정한 규칙 적용을 중시하는 도덕적 관점을 의미합니다(출처: 한국여성철학회).
하지만 길리건은 이런 접근이 남성 중심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콜버그의 연구 대상자는 대부분 남성이었고, 여성들은 도덕 발달 단계에서 낮은 점수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길리건이 여성들을 직접 인터뷰한 결과, 이들은 규칙보다 관계를, 원칙보다 구체적 상황 속 타인의 필요를 더 중시했습니다. 저 역시 제 삶을 돌아보면 "이게 공정한가"보다 "이 선택이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를 먼저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길리건이 제시한 '배려 윤리(ethics of care)'는 관계의 유지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핵심으로 합니다. 쉽게 말해, 도덕이란 추상적 법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고통받는 사람에게 응답하고 관계를 돌보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는 제가 아픈 어머니를 간병하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동생을 돕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윤리였습니다.
<작은 아씨들>이 보여준 관계의 그물망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작은 아씨들(2019)>은 길리건의 배려 윤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네 자매 조, 메그, 베스, 에이미는 각자 다른 꿈을 꾸지만, 서로를 돌보는 끈을 결코 놓지 않습니다. 특히 조(Jo)가 작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면서도 병든 막내 베스를 위해 모든 것을 제쳐두고 달려가는 장면은, 정의의 윤리가 아닌 배려의 윤리가 얼마나 강력한 도덕적 동력인지 보여줍니다.
일부에서는 "여성이 자기 삶을 포기하고 가족을 돌보는 건 희생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저는 동생들을 돕는 것을 희생이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 속에서 제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고, 서로 기댈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영화 속 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구체적인 필요에 응답하며 상호 돌봄의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길리건은 인간에게 가장 큰 도덕적 위기는 '관계의 단절'이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퇴직 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몸마저 아프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내가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자매가 각자의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서로를 챙기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언젠가 필요할 때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통합돌봄 서비스에 담긴 배려의 정치학
최근 정부가 발표한 지역사회 통합돌봄(Community Care) 정책은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시설이 아닌 자신이 살던 곳에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입니다(출처: 보건복지부). 여기서 '통합돌봄'이란 의료, 요양, 주거 지원 등 개별적으로 제공되던 서비스를 한 곳에서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병원은 병원대로, 요양센터는 따로, 주거 지원은 또 다른 곳에서 받던 불편함을 없애고, 한 번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만든 겁니다.

솔직히 이 소식을 듣고 반가웠던 이유는, 이 정책이 기존의 획일적인 복지와는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복지 정책들이 "65세 이상", "소득 하위 몇 퍼센트" 같은 기계적인 기준으로 대상을 나눴다면, 통합돌봄은 개인의 상황과 필요에 맞춰 서비스를 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이는 길리건이 강조한 '구체적 상황 속 응답'과 정확히 일치하는 접근입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면, 저는 아직 취업하지 못한 자녀를 돌보면서 동시에 노부모 봉양까지 해야 하는 이중 부담 속에 있습니다. 제가 아프면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죠. 통합돌봄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저처럼 복합적인 돌봄 책임을 진 사람들도 각자의 필요에 맞는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정책 변화는 남성 중심의 정의 윤리에서 여성의 배려 윤리로 정책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로 보입니다.
배려 윤리가 사회 전체로 확장되려면
'배려의 윤리'라는 개념이 정책에 반영되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실효성이 나타나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일부에서는 "통합돌봄이 결국 가족, 특히 여성에게 돌봄 책임을 떠넘기는 건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 경험상 이런 걱정은 근거가 있습니다. 정책은 좋은데 실행 과정에서 예산 부족, 인력 부족으로 결국 가족이 모든 걸 감당하게 되는 경우를 여러 번 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배려 윤리가 진정으로 사회 전체의 윤리로 자리 잡으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 충분한 예산과 전문 인력 확보: 돌봄 노동자의 처우 개선과 안정적 고용 보장
- 돌봄의 사회화: 가족, 특히 여성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 제도적 뒷받침
- 개인별 맞춤형 접근: 획일적 기준이 아닌 구체적 상황을 고려한 서비스 설계
국회에 쌓여 있는 많은 법안들이 통과되지 못하는 걸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법이 정치적 이해관계로 막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계류 중인 법안이 2만 건이 넘는다고 합니다(출처: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이 중에는 돌봄 노동자의 처우 개선, 가족돌봄휴가 확대 같은 배려 윤리 기반 법안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책을 입안하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작은 실천이 가능합니다. 거창한 봉사가 아니더라도, 오늘 하루 이웃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아픈 반려동물을 챙기는 마음,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는 행위 모두가 관계의 그물망을 촘촘하게 만드는 배려입니다. 제가 동생들 자녀들과 조카들에게 가끔 용돈을 쥐어주고, 혼자 사는 막내 동생에게 반찬을 나눠주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곧 지방선거가 다가옵니다. 선거철에만 국민과 함께하겠다는 공약을 남발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평소에도 국민 개개인의 필요를 세심하게 살피는 후보를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다음 선거에서 '배려 윤리'를 얼마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투표할 생각입니다. 그게 제 세 자매와 같은 처지의 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필요한 정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30년 직장 생활을 하며 "나만의 삶"을 꿈꿔왔지만, 퇴직 후 마주한 현실은 여전히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책임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책임을 짐이 아니라 관계의 증거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길리건의 말처럼 우리는 독립된 섬이 아니라 연결된 그물이니까요. 통합돌봄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언젠가 제 세 자매도 각자의 처지에 맞는 돌봄을 받으며 존엄하게 늙어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배려 윤리가 만들어갈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