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휴대 전화를 내려다봤습니다. 진동 한 번 없는 화면만 반복해서 확인하는 그 기분, 혹시 아시나요? 채용 담당자가 "개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이 아침부터 귓가에 맴돌았지만, 해가 기울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습니다. 톰 행크스가 감독하고 직접 주연한 2011년 영화 《래리 크라운》입니다.
영화는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전 아홉 시, 래리는 해고 통보를 받는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래리 크라운은 자리에 앉습니다. 상사의 표정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지만, 래리는 아직 눈치채지 못합니다. "우리 회사에서 당신보다 더 오래 일한 사람은 없습니다." 칭찬인지 통보인지 모를 그 문장이 끝나고 나서야 래리는 자신이 잘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유는 단 하나, 대학 학위가 없다는 것.
이 장면에서 제가 멈춘 이유는 래리의 표정 때문이었습니다. 분노도,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멍했습니다. 그 멍함이 제 가슴을 건드렸습니다. 저도 비슷한 표정을 지은 날이 있었으니까요.
래리에게 직장은 단순한 월급 통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매일 아침 일어나야 할 이유였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해주는 언어였습니다. 그 언어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겁니다.
철학에서는 이걸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라고 부릅니다. 정체성의 위기란 자신을 규정해오던 역할이나 관계가 무너질 때, 내가 누구인지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중년에 찾아오는 이 감각은 20대의 불안과는 결이 다릅니다. 젊은 시절의 혼란이 "아직 나를 못 찾은 것"이라면, 중년의 위기는 "찾았다고 믿었던 나를 잃은 것"에 가깝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래리의 하루를 본다면
래리는 해고 후 지역 커뮤니티 칼리지에 등록합니다. 경제학, 글쓰기, 스피치 수업을 듣고, 스쿠터 동아리 친구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일상을 조각조각 붙여 나갑니다. 이 변화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냥 작습니다. 하지만 그 작음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저는 읽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세 층위로 나눴습니다(출처: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 노동(Labor):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되는 활동. 밥을 짓고, 청소하고, 잠드는 일.
- 작업(Work): 세상에 남을 무언가를 만드는 활동. 글을 쓰거나 물건을 만드는 일.
- 행위(Action): 다른 사람과 함께 말하고 움직이며 공동의 세계에 참여하는 일.
아렌트에게 "의미 있는 삶"은 임금을 받는 노동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노동이란 단지 반복적인 생존 활동을 뜻하며, 아렌트는 인간이 그것에만 머물 때 오히려 삶이 공허해진다고 봤습니다.
그날 저도 래리처럼 사소한 일들을 했습니다. 아들의 빨래를 정리하고, 귀농귀촌 교육을 들었습니다. 취업이 된 것도 아니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렌트의 눈으로 보면, 저는 그날 노동도, 작업도, 행위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연락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 하루 전체를 지우지는 못합니다.
솔직히 처음엔 이런 철학적 위로가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위로가 되려면 현실이 조금은 달라져야 할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건 "괜찮다"가 아니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라는 걸.
존 듀이가 묻는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배웠습니까
래리의 변화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수업 중 그가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는 순간입니다. 잘 쓴 것도 아니고, 멋진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자기 말을 자기 목소리로 꺼내는 겁니다.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까칠한 테이노 교수조차 그 순간만큼은 잠깐 멈춥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인 존 듀이는 배움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경험을 통해 변화하는 것"(출처: 존 듀이, 『경험과 교육』, Kappa Delta Pi). 듀이에게 교육이란 지식을 주입받는 일이 아니라, 경험을 성찰하고 다음 행동을 바꾸는 과정입니다. 교실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날 귀농귀촌 교육을 들으면서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을 다시 들었습니다. 새로운 정보는 거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시간이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무엇을 알고, 무엇이 아직 불확실하며,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지를 다시 확인했으니까요.
듀이가 말하는 성찰적 경험(Reflective Experience)이란 이런 겁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경험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는 것. 그 과정에서 다음 선택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중년의 재출발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이 성찰의 속도가 느리다는 겁니다. 20대에는 방향이 틀려도 돌아올 시간이 있다고 믿습니다. 40대, 50대, 60대에는 그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더 빨리 답을 찾으려 하고, 결과가 없으면 오늘 전체를 실패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래리도, 저도, 결국 그날 하루를 다 보내고 나서야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오늘 하루 돌아보니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 채용 연락이 오지 않은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나이 때문인지, 경력 때문인지, 단지 경쟁률 때문인지 확인되지 않은 것을 단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아들의 빨래를 정리하는 일과 내 생활을 꾸리는 일은 서로 경쟁하는 선택이 아닐 수 있다. 다만 어디까지가 도움이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개입인지는 계속 생각해봐야 합니다.
- 귀농귀촌 교육에서 새 정보는 없었지만, 내가 아직 정착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이 세 가지만으로 오늘은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락이 없던 오늘, 저는 여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확신보다는 질문이 더 많은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래리 크라운이 회의실에서 나와 스쿠터를 타기 시작했듯이, 재출발은 성공의 순간이 아니라 다음 행동을 선택하는 순간에 이미 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그 질문을 품고 내일 아침을 맞으려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 일자리를 얻지 못한 시간에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성과만으로 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으려면 어떤 관점이 필요할까요? - 중년 이후의 배움은 새로운 일자리를 얻기 위한 수단일까요, 아니면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일까요?
영화 《래리 크라운》의 재출발과 나의 배움은 어떤 점에서 닮아 있을까요? - 자녀를 돌보는 일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일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균형을 찾아야 할까요?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선택과 독립성을 존중하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참고 자료
- 행크스, 톰 감독. 《래리 크라운》(Larry Crowne, 2011).
실직 이후 지역 대학에 등록한 주인공이 새로운 배움과 관계를 통해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영화입니다. 중년의 재출발과 일상의 변화라는 주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아렌트, 한나.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여 살펴본 저서입니다. 임금노동을 넘어 인간의 삶과 사회적 참여가 지니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듀이, 존. 《경험과 교육》(Experience and Education, 1938).
경험과 교육의 관계를 탐구한 저서입니다. 새로운 배움이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경험을 성찰하고 이후의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듀이, 존.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 1916).
교육과 사회적 경험, 민주적 공동생활의 관계를 다룬 저서입니다. 배움이 특정 시기의 학교 교육에 한정되지 않고 삶 전반에서 이루어진다는 관점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A1%9C%EB%A7%A8%ED%8B%B1%20%ED%81%AC%EB%9D%BC%EC%9A%B4(%EC%98%81%ED%99%9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2778023
https://kdp.org/publications/kdp-publications/kappan/read/kappan-article/2015/12/01/dewey-s-experience-and-education-revisi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