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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원하는 안정과 내가 원하는 삶은 다를 수 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

by cinema-1 2026. 8. 24.

아들이 "계속 다니기 싫다"고 말했을 때, 저는 잠깐 말을 잃었습니다. 정규직에 월세 지원에 근속 인센티브까지. 제가 퇴직 후 기간제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얼마나 간절하게 원했던 조건들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직후,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가 "엄마가 너무 원하는 걸 다 들어줘서 그렇다"는 말까지 듣고 나니, 울고 싶어졌습니다. 내가 잘못 키운 걸까. 더 냉정했어야 했을까. 그 혼란 속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습니다. OTT 새 가입이 귀찮아서 영화 대신 책으로 손이 갔는데,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싫다는 말 뒤에 있는 것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아들의 "싫다"가 단순한 불평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도 처음에는 자신이 왜 불편한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과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낯선 감각 사이에서, 그냥 흔들릴 뿐입니다.

헤세는 이 소설을 통해 개성화(Individuation)라는 과정을 그립니다. 개성화란 외부에서 주어진 역할이나 기대를 벗어나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해가는 심리적 성장을 뜻합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를 융이 발전시킨 개념으로, 헤세는 융과 실제로 교류하며 이 작품을 썼습니다(출처: C.G. Jung Institute Zurich). 싱클레어의 방황은 반항이 아니라, 개성화의 시작이라고 읽힙니다.

그렇게 보니 아들의 말이 조금 달리 들렸습니다. "싫다"는 말은 어쩌면 "이 길이 내 길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말일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멈춘 이유는 바로 그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데미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단지 내 안에서 저절로 솟아나오려는 삶을 살려고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지인들 앞에서 엄마로서 부끄러웠던 그 순간, 저는 오히려 이 문장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잘못 키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영화와 소설 <데미안>과 헤르만 헤세

 

알을 깨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이미 데미안을 읽어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 알을 깨고 나오는 새를 떠올려봅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 상징을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읽으면 불편해집니다. 부모가 만들어준 세계, 그러니까 안정적인 직장, 경제적 지원, 걱정 어린 조언, 이 모든 것이 어느 순간 자녀에게는 깨야 할 알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헤세가 보여주는 것은 부모를 부정하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실존적 선택(Existential Choice)의 문제입니다. 실존적 선택이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는, 자신이 직접 감당해야 하는 결정을 뜻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을 때, 그 핵심도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삶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틀이 없고, 내가 선택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xistentialism).

그러니까 직장을 그만두느냐 마느냐보다, 그 선택 이후를 어떻게 살아갈지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아들이 스스로 그 질문에 다가가고 있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제가 퇴직 후 재취업에 매달리다가 어느 순간 잠시 멈췄을 때, 그때서야 텃밭이 보이고 오랜 친구가 보이고 보고 싶었던 책이 보였습니다. 그전까지는 불합격 통보를 받을 때마다 "나는 이제 필요 없는 사람인가" 싶었는데, 사실 그 질문 자체가 남들의 기준으로 저를 재던 방식이었습니다.

부모의 질문이 바뀌면 관계가 바뀐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이 아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아니라, 제가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데미안에서 멘토 역할을 하는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답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싱클레어가 스스로 질문하도록 자극할 뿐입니다. 그것이 진짜 동반이라는 것을 헤세는 보여줍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의 종류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나뉩니다.

  • 답을 주는 말: "1년만 버텨. 인센티브 받고 나서 생각해."
  • 조건을 제시하는 말: "월세 지원이 끊기면 어떡하려고?"
  • 질문을 건네는 말: "무엇이 가장 힘들어?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어?"

세 번째 말이 가장 하기 어렵습니다. 답을 모른 채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개념(Self-Concept)의 측면에서 보면, 자기개념이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내면의 인식을 뜻하는데, 이것은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정답을 먼저 말해버리면, 자녀가 스스로 자기개념을 만들어갈 기회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아들에게 처음엔 조건을 들이밀었습니다. 그런데 데미안을 다시 읽고 나서, 딱 한 마디를 바꿨습니다. "엄마는 네가 안정적이면 좋겠어. 그런데 네 인생은 네가 살아야 하잖아." 아들이 뭐라고 답했는지보다, 그 말을 꺼냈을 때 제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는 것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데미안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무 살에 읽으면 자신의 반항에서 위로를 찾고, 예순 살에 읽으면 자녀를 향한 집착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습니다. 저는 후자의 독자였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기준으로 '좋은 삶'을 그리고 있습니까. 아들을 향한 질문이었는데, 돌아보니 제 자신에게 먼저 해야 할 말이었습니다. 헤세가 남긴 것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었고,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도 아직 걷는 중입니다.

 

생활 속에서 《데미안》을 적용해보는 세 가지 방법

첫째, 다른 사람의 기준과 나의 기준을 구분해보기

“좋은 직장”, “성공한 삶”, “안정적인 삶”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그것이 나에게도 중요한지 생각해봅니다.

 

둘째, 선택하기 전에 자신의 이유를 적어보기

직장을 계속 다니거나 그만두는 것처럼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싫어서”에서 멈추지 말고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까지 적어봅니다.

 

셋째, 자녀에게 답보다 질문을 건네기

부모가 경험한 정답을 알려주기보다 자녀가 자신의 선택을 생각할 수 있도록 질문해봅니다.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싶니?”

이 질문 하나가 때로는 긴 조언보다 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 내가 자녀에게 권하는 안정적인 삶은 정말 자녀가 원하는 삶일까?
  • 나는 지금까지 남들이 정한 기준에 맞춰 살아온 부분은 없을까?
  • 지금부터라도 내가 선택해서 살아보고 싶은 삶은 어떤 모습일까?

참고: https://namu.wiki/w/%EB%8D%B0%EB%AF%B8%EC%95%88(%EC%86%8C%EC%84%A4)
https://www.junginstitut.ch/en/
https://plato.stanford.edu/entries/existential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