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連帶)라는 단어는 과연 영화 속 스크린 안에서만 유효한 환상일까요? 저는 얼마 전 비산먼지 점검 업무 중 거대한 덤프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겪으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머리가 아닌 서늘한 몸의 감각으로 먼저 배웠습니다. 사고 후 도착한 보험사의 문자는 지극히 사무적이었고, 병원의 치료 과정은 기계처럼 반복적이었습니다. 효율과 프로토콜이 지배하는 시스템 속에서 '인간의 고통'은 설 자리를 잃었고, 저는 그 공허한 틈새에서 노벨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우(Kenneth Arrow)의 '불가능성 정리'를 떠올렸습니다.
애로우는 수학적으로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합의'란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세 가지 이상의 선택지가 부딪힐 때,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결론 도출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 차가운 논리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저에게 지독한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보험사는 계약의 합리성을, 병원은 의료의 효율을 추구했지만, 그 정당한 선택들 사이에서 피해자인 저는 기필코 '증발'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영화 〈카트〉 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과 애로우가 강조한 '정보의 비대칭성'을 연결하여, 완벽한 정의가 불가능한 이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의 곁을 지키는 '차선의 연대'를 이룰 수 있을지 사유해 보고자 합니다.

불가능성 정리가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들
노벨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우는 불가능성 정리(Impossibility Theorem)를 통해, 구성원 개개인의 선호를 모두 반영하면서도 일관성 있고 민주적인 사회적 선택을 도출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여기서 불가능성 정리란, 세 가지 이상의 선택지가 있을 때 어떤 투표 방식을 써도 구성원 모두를 합리적으로 만족시키는 결과를 낼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 '모두가 웃는 정책'은 원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정리는 정치학이나 사회선택이론 교과서에서만 다루는 추상적 논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사고 이후 저는 그 이론이 아주 구체적이고 차가운 방식으로 일상에 작동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보험사는 '계약상 처리'라는 합리성을 따랐고, 병원은 '의료 프로토콜'이라는 효율을 따랐습니다. 어느 쪽도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저는 그냥 증발해버렸습니다.
애로우는 단순히 불가능을 선언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적 책임과 경제적 효율성』에서 정보의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상황, 즉 판매자나 고용주가 구매자나 노동자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구조에서 기업이 윤리적 책임을 받아들일 때 경제 시스템 전체의 효율성이 오히려 올라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보의 비대칭이란 거래 당사자 간에 보유한 정보의 양과 질이 불균등한 상태를 말합니다. 사고 피해자와 보험사 사이, 비정규직 노동자와 대기업 사이가 정확히 이 구조입니다.
시청 앞에서 고공 농성을 하며 확성기를 드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저는 선뜻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의 감정이었습니다. 공감은 했지만 발이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애로우의 정리가 몸으로 이해됐습니다. 다원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관계가 너무 촘촘하게 분산되어 있으면, 공감하면서도 연대하지 못하는 상태가 구조적으로 발생합니다.
현실에서 이 정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해관계자가 많을수록 합의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 정보 비대칭이 클수록 약자는 선택지 자체를 박탈당합니다.
- 완벽한 정의가 불가능한 구조에서는 결국 힘 있는 쪽의 논리가 '합리성'으로 포장됩니다.
국내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2023년 기준 전체 임금 근로자의 약 37.0%에 달합니다(출처: 통계청).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불가능성 정리가 현실에서 불평등하게 작동하는 피해자가 결코 소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차선의 연대, 영화 밖에서 찾는 법
영화 〈카트〉는 대형 마트의 비정규직 계산원들이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린 것은 스크린 속 연대 장면이 감동적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영화 속 연대는 너무 깔끔하게 묶이고, 너무 뚜렷한 적(敵)이 있었습니다. 제 경험상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적이 누구인지도 흐릿하고, 함께 싸울 동료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트〉가 보여주는 핵심은 '완벽한 승리'가 아니라 '곁에 있기'였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차선이론(Theory of Second Bes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차선이론이란, 최적의 조건이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을 때는 나머지 조건들을 최적화하더라도 전체 최적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현실적으로 달성 가능한 두 번째로 좋은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유토피아적 정의가 불가능하다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고통을 1%라도 줄이는 것이 현실적 정의의 출발점이 됩니다.
저는 비산먼지 점검 업무를 하면서 매일 에어코리아 앱으로 대기오염도(PM2.5, PM10 수치)를 확인하고 현장 점검 일지를 기록합니다. PM2.5란 지름이 2.5마이크로미터 이하인 초미세먼지로, 폐 깊숙이 침투해 심혈관 질환과 호흡기 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물질입니다. 덤프트럭 사고 이후에도 핸들을 잡으면 손이 떨렸지만, 그 일지는 계속 써야 했습니다. 그게 제가 찾을 수 있는 차선의 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환경부에 따르면 건설 현장 비산먼지는 국내 PM10 발생량의 주요 배출원 중 하나로 지목되어 있으며, 현장 점검과 관리 강화가 지속적으로 권고되고 있습니다(출처: 환경부). 제가 기록한 수치 한 줄이 단지 서류 작업이 아니라, 누군가의 폐에 닿는 공기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그 사고 이후 더 선명하게 인식하게 됐습니다.
일반적으로 '연대'라고 하면 거리에서 함께 구호를 외치는 집단적 행동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연대의 진짜 출발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사람의 고통을 제 일처럼 느끼는 데 있습니다. 사고 이후 저는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일하는 농업 노동자, 현장 안전 사각지대에 놓인 청년 일용직 노동자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취약성이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의 감각으로 이해됐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정의를 요구하지 말고, 우선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을 나누는 것. 사회적 책임이란 개인 혹은 조직이 자신의 행동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이를 책임지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틈새에서 우리가 서로를 놓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고 이후 핸들을 잡을 때마다 떨리는 손이 아직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점검 일지를 한 줄 더 씁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적어도 제 손이 닿는 곳에서는 공기가 조금 더 맑아지기를 바라면서요. 그 성실한 한 줄이 쌓여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눈도 열린다고 저는 믿습니다. 차선은 포기가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