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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 후에도 나에게 필요한 일은 남아 있을까 《리빙(어떤 인생)》과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

by cinema-1 2026. 9. 21.

직장을 잃고 나서 처음 며칠은 이상하게 조용했습니다. 아침이 와도 갈 곳이 없고, 해야 할 일의 윤곽이 사라진 느낌. 그 공백 속에서 문득 떠올린 영화가 있었습니다. 2022년 개봉한 《리빙(Living)》(어떤 인생)이었습니다. 올리버 허머너스 감독이 연출하고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본을 쓴 이 작품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2년작 《이키루》를 런던으로 옮긴 영화입니다. 저는 주인공 윌리엄스를 보면서 그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 사실은 제 자신에게 향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사람은 하나의 그릇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 속 윌리엄스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민원을 다른 부서로 넘기는 일을 반복합니다. Film4의 소개에 따르면 그는 "오랜 사무실 생활에 의해 존재감이 희미해진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그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합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이었는가.

저도 비슷한 질문 앞에 섰습니다. 제가 맡았던 직무가 사라지자, 처음에는 제 자신까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감각을 설명할 단어를 찾다가 공자의 짧은 문장 하나에 닿았습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 《논어》 「위정」 2.12에 나오는 말입니다. 직역하면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가 됩니다. 그릇이란 특정한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입니다. 컵은 물을 담고, 망치는 못을 박습니다. 그 쓰임 이외의 역할은 하지 못합니다. 공자는 사람을 그런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군자불기는 한 사람을 특정한 기능 하나로만 규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다양한 역할로 응답할 수 있는 인간상을 가리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nfucius).

솔직히 처음에는 이 문장이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요? 그릇이 아니면 뭔데요?"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들여다보니 이 구절은 하나의 질문을 돌려주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스스로를 어떤 그릇이라고 믿어왔습니까.

실업 후 처음으로 고용센터 실업인정 활동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자원봉사센터 공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지역사회 행사를 촬영하고 영상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리면 봉사활동으로 인정받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유튜브 계정조차 없었습니다. 영상 편집은 사진 편집과는 또 다른 세계였습니다. 그런데도 바로 신청했습니다. 제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감각을 되찾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날 처음 계정을 만든 분도 있었고, 이미 다른 사람에게 유튜브와 AI를 강의하고 있다는 연세 있는 남성분도 계셨습니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었지만 출발점이 모두 달랐습니다. 그 장면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줬습니다. 사람은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단계에서 시작하든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영화 <리빙>과 군자의 군자불기 사상 이미지

 

배운다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

 

공자는 《논어》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 문장을 학창 시절에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튜브 계정을 처음 만들어본 날 저녁에 이 문장을 다시 읽으니 전혀 다르게 들렸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배움, 즉 수기(修己)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행위가 아닙니다. 수기란 자신을 지속적으로 닦고 다듬는 과정을 뜻합니다. 한 번의 교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여러 국면에서 반복되는 실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의 철학은 완성된 인간을 이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계속 배우고 변화하는 과정 자체를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nfucius).

영화 속 윌리엄스가 저를 움직였던 것도 그 지점입니다. 그는 남은 시간 안에 거대한 업적을 남기려 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민원으로만 남아 있던 동네 공원 하나를 실제로 만들어내려 합니다. 영국영화협회(BFI)는 이 과정을 "자신의 흔적이 될 만한 작은 일을 선택하는 결심"으로 설명합니다. 거창한 의지가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나를 제대로 해내겠다는 방향 전환입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저는 영상 제작 과제 다섯 가지를 받아 들고 나왔습니다. 아직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 다섯 가지가 오히려 묘하게 뿌듯했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감각 자체가 달랐습니다.

수업이 끝난 뒤 남편과 함께 영월의 붉은 메밀꽃밭으로 향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피지 않은 꽃밭이었는데,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풍경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 장면을 나중에 영상으로 기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배움이 바꾸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날 오후에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영월 붉은 메밀꽃밭에서 촬영한 사진

 

 

공자의 인(仁)이라는 개념도 오늘의 경험과 이어졌습니다. 인(仁)이란 단순히 '착한 마음'이 아닙니다. 타인을 향한 관심과 배려가 실제 관계 속에서 드러날 때 완성되는 덕목입니다. 지식을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건너갈 때 또 다른 의미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날 강의실에서 유튜브와 AI를 강의하는 분이 동시에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충분히 아는 사람이 왜 다시 배우는 자리에 앉아 있을까,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분은 배움과 나눔을 동시에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배운 것을 언젠가 다른 사람이 막혔을 때 꺼내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인(仁)의 방향에 닿아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오늘 하루에서 정리한 질문들을 남겨봅니다.

  • 나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하나의 직업으로만 설명해왔는가?
  • 직업이 사라졌을 때 함께 사라진다고 느낀 것들은, 정말로 사라진 것인가?
  • 지금 내가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으로 누구에게 닿을 수 있는가?

'일자리가 없다'와 '할 일이 없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 두 문장 사이의 거리를 오늘 처음으로 실제로 느꼈습니다.


《리빙(어떤 인생)》의 윌리엄스는 끝내 무언가를 완성합니다. 그 완성이 세상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앉아 있던 그 공원 그네 위에서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같은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당신에게 남아 있는 쓰임은 무엇입니까. 직함 없이, 명함 없이, 그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저는 아직 그 답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유튜브 계정 하나를 만들었고, 과제 다섯 개를 받았고, 붉은 메밀꽃 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한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첫째, 나는 지금까지 나를 하나의 직업이나 직함으로만 정의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직장을 잃은 뒤 사라진 것은 직업일 뿐인지, 아니면 내가 가진 경험과 능력까지 사라진 것처럼 느끼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지금의 나에게 새롭게 배워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직업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사진, 영상, 글쓰기, 컴퓨터, AI, 외국어, 지역문화 등 작은 배움 하나가 새로운 역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내가 가진 능력으로 지역사회에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요?

시간을 내어 봉사하는 것뿐 아니라 지역행사를 기록하고, 농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을 나누는 것도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Oliver Hermanus, 《Living》(2022). Akira Kurosawa의 《Ikiru》(1952)를 런던으로 옮긴 작품으로, Bill Nighy가 지방정부 공무원 Mr. Williams를 연기했습니다. Film4와 British Council은 이 작품을 반복적인 관료 업무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는 이야기로 소개합니다.
BFI, 《Living》 해설. 영화의 주인공이 자신의 남은 시간 동안 작지만 의미 있는 일을 남기기로 결심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논어》 「위정」 2.12,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를 하나의 특정한 용도에만 한정되는 ‘그릇’과 다르게 보는 구절입니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nfucius. 공자의 인(仁), 배움과 수양, 타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윤리사상을 설명합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A6%AC%EB%B9%99:%20%EC%96%B4%EB%96%A4%20%EC%9D%B8%EC%83%9D
https://plato.stanford.edu/entries/confuci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