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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Snowpiercer)로 보는 도덕철학 (공리주의, 의무론, 정언명령)

by cinema-1 2026. 3. 4.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윌포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차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전체 시스템을 위해 일부 하층민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제 아이들의 시험 성적표를 받아들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과정은 외면한 채 결과만 보고 실망했던 그 순간 말입니다.이렇게 공부해서는 성공하지 못할거라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좀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리주의와 행복의 계산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공리주의란 행위의 옳고 그름을 결과로 판단하되, 관련된 모든 사람의 행복을 합산하여 그 총량이 가장 큰 선택을 도덕적이라고 보는 철학입니다.

벤담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쾌락 계산법(Felicific Calculus)이라는 구체적인 측정 도구를 제시했습니다. 쾌락 계산법이란 행복의 강도, 지속성, 확실성 등 7가지 기준으로 쾌락을 수치화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방법입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이러한 발상은 혁명적이었습니다(출처: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도덕을 감정이나 종교가 아닌 수학적 계산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국열차의 윌포드는 전형적인 공리주의적 사고를 보여줍니다. 열차가 멈추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지만, 하층민 일부를 희생시켜 시스템을 유지하면 더 많은 사람이 생존합니다. 숫자로만 보면 윌포드의 선택은 정당화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이런 계산을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분리수거가 귀찮아서 플라스틱을 일반 종량제 봉투에 버릴 때,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단횡단을 할 때 말입니다.

하지만 공리주의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습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권리가 완전히 무시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역사적으로 노예제도, 식민지 착취, 강제 수용소 등은 모두 "제국의 번영을 위해"라는 공리주의적 논리로 정당화되었습니다.

벤담의 제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공리주의를 수정했습니다. 밀은 쾌락에 질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단순한 생물학적 생존의 쾌락보다 자유, 존엄, 자기실현의 쾌락이 더 고차원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윌포드의 체제는 생존의 총합만 극대화할 뿐, 인간다운 삶의 총합은 오히려 감소시킵니다.

칸트의 정언명령과 인간 존엄

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벤담과 정반대의 출발점을 가집니다. 칸트의 의무론(Deontology)은 도덕의 기준이 결과가 아니라 원칙에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의무론이란 행위의 옳고 그름을 그 행위를 이끄는 동기와 원칙으로 판단하는 윤리 이론입니다.

칸트가 제시한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은 도덕철학사에서 가장 강력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정언명령이란 어떤 조건이나 목적과 무관하게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도덕 법칙을 의미합니다. 칸트는 이를 두 가지 핵심 공식으로 제시했습니다.

첫째, 보편화 공식입니다. "네 행동의 원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설국열차에 이를 적용해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소수를 희생해도 된다"는 원칙이 모든 사회에 보편적 법칙으로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누구든 언제든 희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어떤 신뢰도, 어떤 공동체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인간성 공식입니다. "인간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 설국열차에서 하층민은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입니다. 아이들은 엔진 부품으로 사용되고, 하층민의 노동과 생명은 상층부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소비됩니다(출처: 케임브리지 대학교 철학과). 이는 칸트의 인간성 공식을 정면으로 위반합니다.

저는 제 자녀들을 키우면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바라는 것이 정말 아이들을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제 만족감을 위해 아이들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칸트의 사상이 때로 답답하고 딱딱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상에서 적용해보니 칸트의 원칙은 장기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칸트에게 도덕적 행위란 결과를 예측하여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양심의 명령, 즉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도덕적입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원칙을 지키는 것 말입니다.

두 철학의 충돌과 현실 적용

설국열차의 주인공 커티스(Curtis)는 가장 극적인 선택의 순간 앞에 섭니다. 윌포드는 그에게 시스템을 물려받을 것을 제안합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쪽에 서면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벤담이라면 받아들일 법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커티스는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설령 불확실하고 위험하더라도, 인간을 부품으로 쓰는 시스템의 논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선택은 칸트적입니다. 커티스의 반란은 단순한 혁명이 아니라 "인간은 계산의 재료가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현대 사회는 실제로 이 두 철학을 함께 사용합니다. 헌법은 칸트적입니다. 다수결로도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정책은 벤담적입니다. 제한된 자원을 최대 효과가 있는 곳에 배분하기 때문입니다.

 

설국열차의 딜레마 벤담과 칸트

 

예를 들어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을 돌이켜보겠습니다. 중환자실 병상이 부족할 때 누구를 먼저 치료해야 했을까요? 생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우선시하는 것은 공리주의적 선택입니다. 하지만 모든 환자의 생명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칸트적 원칙입니다.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이 두 원칙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조정합니다.

구조조정은 기업 전체를 살리기 위한 선택일까요, 아니면 일부 노동자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일까요? 자동화로 인한 실업은 사회 전체의 효율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비용일까요? 테러를 막기 위해 모든 국민의 통신을 감시하는 것은 정당할까요?

이 질문들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역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다니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여긴 적은 없었는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전체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한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작은 설국열차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철학은 공존할 수 없을까요? 효율을 추구하되, 효율의 제단에 인간 존엄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 것.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법치주의와 인권의 역할입니다. 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과제입니다.

도덕철학은 교과서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선택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 결과만 보고 있는가, 아니면 과정의 원칙도 보고 있는가? 저는 지금 누군가를 수단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제가 따르는 이 원칙이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면, 저는 여전히 안전한가?

설국열차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사고가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열차에 타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열차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직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벤담은 계산하라고 말하고, 칸트는 계산을 멈추라고 말합니다. 두 철학자는 서로 다른 열차의 칸에 타고 있지만, 그들이 함께 던지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당신은 어떤 원칙 위에 서 있습니까?"


참고: https://infocarry.tistory.com/entry/%EC%8A%A4%EB%85%B8%EC%9A%B0%ED%94%BC%EC%96%B4%EC%84%9CSnowpiercer-%EB%A6%AC%EB%B7%B0-%E2%80%93-%EA%B3%84%EA%B8%89%EC%9D%B4-%EB%A9%88%EC%B6%94%EC%A7%80-%EC%95%8A%EB%8A%94-%ED%95%9C-%EC%97%B4%EC%B0%A8%EB%8F%84-%EB%A9%88%EC%B6%94%EC%A7%80-%EC%95%8A%EB%8A%94%EB%8B%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