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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라진 마을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킬 수 있을까 《Ek Tha Gaon 엑 타 가온 》으로 바라본 지방소멸과 하이데거의 ‘거주’

by cinema-1 2026. 9. 12.

"건축하는 것이 곧 거주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가 남긴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는 솔직히 너무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거주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그런데 평일 오후, 농촌 바자회가 끝난 뒤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그 말이 갑자기 다르게 들렸습니다. 운동장은 있었습니다. 부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자마자 그 공간은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건물은 남아 있는데 생활이 사라지는 풍경. 《Ek Tha Gaon》은 바로 그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보지 않으신 분들도 충분히 따라오실 수 있도록 장면을 최소한으로만 언급하겠습니다.

 

 

지방 작은 마을에서 열린 바자회 사진

 

마을이 비어간다는 것, 그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리슈티 라케라 감독이 2021년 완성한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힌디어로 "한때 마을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인도 우타라칸드 주 히말라야 산간 마을 셈라를 기록한 작품으로, 제69회 인도 국립영화상에서 두 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났고, 남은 것은 노인들과 산과 빈 집들입니다.

카메라는 거창한 통계를 들이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마당을 쓸고, 한 사람이 길을 걷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골목을 바라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멈춰야 했습니다. 지방소멸을 다룬 수많은 보도와 정책 문서를 읽었지만, 그것들은 전부 숫자였습니다. 이 영화는 숫자가 아니라 표정이었습니다.

여기서 민족지학(Ethnography)이라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민족지학이란 특정 공동체의 삶을 내부에서 관찰하고 기록하는 방식으로, 통계나 분석 대신 사람들의 일상 자체를 자료로 삼는 접근법입니다. 라케라 감독은 이 방법을 택했고, 덕분에 셈라의 소멸은 사회 현상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독으로 전달됩니다.

동시에 이 영화는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적 시선도 품고 있습니다. 사회생태학이란 인간 공동체와 자연환경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사람이 떠난 마을에서 논밭은 방치되고, 산길은 무너지고, 생태계의 균형도 함께 흔들립니다. 마을의 소멸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나라 농촌을 걸어보면 비슷한 장면을 어렵지 않게 마주칩니다. 오래된 가게 앞에 먼지가 쌓여 있고, 아이들 없는 운동장에 잡초가 올라와 있습니다. 마을회관 불은 켜져 있는데 사람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숫자의 감소가 아니라 관계의 감소입니다.

하이데거는 말했고, 이 영화는 보여줍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1951년 강연 "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Bauen Wohnen Denken)"에서 인간 존재의 근본 방식을 '거주함(Wohnen)'으로 정의했습니다(출처: Martin Heidegger, "Building Dwelling Thinking", 1951). 거주함이란 단순히 어떤 공간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장소와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고, 자신의 삶을 그 땅 위에 세우는 행위 전체를 뜻합니다. 주소가 있다고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Ek Tha Gaon》의 빈 마을은 더 선명하게 읽힙니다. 그 마을에는 집이 있습니다. 길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말한 의미의 거주는 이미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누군가와 밥을 먹고, 다음 계절을 함께 기다리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없다면, 집은 집이 아니라 구조물에 불과합니다.

반면 가스통 바슐라르는 저서 『공간의 시학(La Poétique de l'Espace)』에서 집을 "인간이 꿈을 간직하는 최초의 공간"이라고 불렀습니다(출처: Gaston Bachelard, 『공간의 시학』, 동문선). 바슐라르에게 집은 기억과 감정이 쌓이는 장소입니다. 하이데거가 거주의 조건을 '관계'에서 찾았다면, 바슐라르는 그것을 '기억'에서 찾았습니다.

이 두 철학자를 나란히 놓으면 흥미로운 대화가 만들어집니다. 하이데거는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묻고, 바슐라르는 "무엇을 기억하느냐"를 묻습니다. 《Ek Tha Gaon》은 그 두 질문 모두에 답하려 합니다. 남겨진 노인은 아직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고, 동시에 사라진 이웃들의 기억을 혼자 품고 있습니다.

저는 귀농인의 집에서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농촌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어 왔지만, 가장 힘든 것은 농사나 소득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시설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관계가 없어서였습니다. 하이데거라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아직 거주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Ek Tha Gaon>과 하이데거의 철학사상 이미지

 

사람을 데려오는 것과 사람이 머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지방소멸을 막겠다며 내놓은 정책들을 보면 몇 가지 패턴이 반복됩니다.

  • 지역 축제와 바자회 개최
  • 청년 정착금 및 귀농·귀촌 지원
  • 관광 인프라 및 공공시설 확충
  • 공공기관 이전과 기업 유치

이 중 어느 것도 나쁜 정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바라보면 질문이 생깁니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사람은 남아 있는가. 정착금을 받은 청년이 3년 후에도 그 마을에 있는가. 관광객이 다녀간 마을에 생활이 생겼는가.

제가 경험한 바자회의 운동장이 그랬습니다. 행사는 분명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였고, 웃음이 있었고, 물건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자 그 공간은 다시 텅 비었습니다. 그것이 아쉽다기보다는, 그 광경이 하나의 질문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이벤트를 만들고 있는 건가, 아니면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건가.

공동체(Community)란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공통의 기억, 반복되는 만남,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 쌓여야 생기는 것입니다. 이벤트는 그 공동체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이벤트 자체가 공동체는 아닙니다.

《Ek Tha Gaon》이 보여주는 셈라 마을의 노인들은 그 차이를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빈 집이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관계의 흔적입니다. 누가 어느 밭을 갈았는지, 어느 해 겨울이 유독 혹독했는지, 누구의 아이가 어느 학교로 떠났는지. 그 기억들을 이어갈 사람이 없을 때, 마을은 진짜로 사라집니다.

그래서 저는 지방소멸의 해법을 이렇게 다시 질문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데려올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이 그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라고.

그날 바자회의 텅 빈 운동장을 떠올립니다. 그 고요함이 실패의 증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아직 묻지 않은 질문들이 기다리고 있는 공간처럼 보였습니다. 사람의 수가 줄어도 사람 사이의 밀도는 높아질 수 있지 않을까. 작아지는 마을이 반드시 죽어가는 마을은 아니지 않을까. 하이데거가 말한 '거주'가 가능한 곳, 즉 내가 이곳에 있어도 괜찮다고 느끼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곳, 그런 곳을 만드는 일은 인구 숫자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Ek Tha Gaon》은 끝내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한 마을의 고요함을 오래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각자가 다른 질문을 찾게 됩니다. 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볼 질문

  1. 사람이 떠난 마을을 살리는 것은 시설일까요, 아니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일까요?
  2. 우리는 지방소멸을 반드시 막아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구가 감소한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3. ‘고향을 지킨다’는 것은 그곳에 끝까지 남는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떠난 사람도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요?

참고: https://www.wikiwand.com/en/Ek_Tha_Gaon
https://www.poetryfoundation.org/harriet-books/2011/04/building-dwelling-thinking
https://www.yes24.com/Product/Goods/3486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