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고 며칠째, 마음의 갈피를 잡기가 참 어렵습니다.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은 차가운 산업단지의 소음보다 더 날카롭게 제 영혼을 할큅니다. 하지만 그 어두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득 한 가지 질문이 발을 잡았습니다. '지금 나의 이 분노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지고 있을까?'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는 예술의 본질을 '감염성(Infectiousness)'이라 불렀습니다. 한 사람이 느낀 진실한 감정이 타인에게 병처럼 옮겨가 정신적 합일을 이루는 것, 그것이 곧 예술이자 도덕이라는 논리입니다. 필자 또한 민간점검원으로서 현장을 누비며, 딱딱한 법 규정보다 "이 매연이 우리 아이들의 폐로 들어갑니다"라는 진심 어린 '감정의 전이'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더 빠르게 움직이는지 목격해 왔습니다.
오늘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불행 속에서 적군마저 형제로 만든 음악의 기적, 영화 <피아니스트(2002)>를 통해 고통과 분노를 '공감'이라는 예술로 승화시킨 톨스토이의 사상을 나누어보려 합니다. 사고의 후유증으로 뒤숭숭한 저의 마음과, 지금도 포화 속에 있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의 선율이 되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의 감염성 이론, 예술은 왜 도덕이어야 하는가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의 핵심을 '감염성(infectiousness)'으로 규정했습니다. 여기서 감염성이란 작가가 경험한 감정이 작품을 통해 감상자에게 그대로 옮겨가는 힘을 의미합니다. 마치 병이 전이되듯, 선한 감정이 타인에게 번져나갈 때 비로소 그것이 진짜 예술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저는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 '그건 너무 도덕주의적인 예술관 아닌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아름다움 자체가 목적인 예술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현장에서 불법 소각을 하는 분을 만났을 때, 과태료 조항을 꺼내기 전에 "이 연기가 아이들 폐에 직접 들어갑니다"라고 말했더니 표정이 달라지는 걸 보았습니다. 규정이 아닌 감정이 먼저 닿은 순간이었습니다. 그게 톨스토이가 말한 감염성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는 또한 진정한 예술이 민족·계급·언어의 장벽을 초월해 모든 인간을 도덕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를 그는 '형제애적 유대(brotherly union)'라 불렀는데, 쉽게 말해 나와 전혀 다른 처지의 사람도 같은 감정 앞에서는 한 인간으로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관점에서 예술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인류가 공유해야 할 도덕적 언어에 가깝습니다(출처: 한국톨스토이연구학회).
영화 <피아니스트>가 증명한 공감의 순간
2002년 개봉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유대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스필만이 2차 세계대전 바르샤바에서 나치의 감시를 피해 살아남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스필만이 독일 장교 빌름 호젠펠트 앞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순간입니다. 굶주림과 공포로 손도 떨리는 상황에서 울려 퍼진 피아노 선율은 두 사람 사이의 적대적 관계를 일순간 녹여버립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음악 하나가 '적군과 아군'이라는 틀을 허물어버리는 장면이 이렇게까지 설득력 있을 줄 몰랐습니다.
호젠펠트가 스필만을 도운 것은 그가 유명 피아니스트여서가 아닙니다. 연주에 담긴 삶의 의지와 슬픔에 '감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가 정의한 정신적 합일(spiritual union), 즉 두 사람의 내면이 예술을 매개로 하나가 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정신적 합일이란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의 감정적 경계가 허물어지고, 동일한 감각을 공유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영화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전쟁이라는 배경이 여전히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수많은 병사와 민간인이 희생되고 있는 지금, 스필만의 선율이 담긴 이 장면은 단순한 영화적 감동을 넘어섭니다.
러시아의 문화적 유산과 지금의 전쟁 사이에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차이콥스키, 볼쇼이 발레단. 러시아는 인류 문화사에서 가장 풍요로운 예술적 유산을 남긴 나라 중 하나입니다. 제가 직접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러시아 문학이 유독 인간의 고통과 도덕적 갈등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문학의 토양에서 자란 나라가 하루아침에 이웃 나라를 침공하는 모습을 보며, 솔직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톨스토이가 강조한 예술의 도덕성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실은 톨스토이식 논리와 정반대로 흐르고 있습니다. 힘 있는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공하고, 국제사회의 관심은 또 다른 분쟁 지역으로 빠르게 이동합니다. 우리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는데, 힘과 재물을 가진 나라가 오히려 물리력으로 더 가지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두 가지 시각이 엇갈립니다.
- 예술은 현실 정치 앞에서 무력하다는 시각: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도, 탱크와 미사일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냉소적 견해입니다.
- 예술만이 장기적으로 적대를 허물 수 있다는 시각: 전쟁은 끝나도 문화는 남고, 서로의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적대감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두 번째 시각에 조금 더 기울어 있습니다만, 단기적으로는 첫 번째 시각을 완전히 부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 지역에서 피아노를 치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네스코(UNESCO)는 무력 충돌 속에서도 문화유산 보호와 예술 활동 지속이 공동체 회복력(resilience)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출처: UNESCO). 여기서 회복력이란 외부 충격에도 공동체가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고 재건해나가는 능력을 뜻합니다.
점검 현장에서 배우는 공감이라는 실천
산업단지 점검 일지를 쓰다 보면, 수치와 규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 정도 태우는 게 뭐가 문제냐"는 반응을 접할 때, 과태료 조항을 먼저 꺼내드는 것과 "여기서 나는 연기가 바로 옆 주민들 폐 속으로 들어갑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감정이 먼저 닿는 방식이 규정보다 훨씬 빠르게 마음을 움직입니다.
대기오염물질 배출 허용 기준이나 비산먼지(fugitive dust) 저감 조치, 이런 전문 용어들이 현장에서 당장 와닿지 않는 분들에게는 그것보다 "우리 아이들이 마실 공기"라는 한 문장이 더 강력한 설득입니다. 여기서 비산먼지란 일정한 배출구 없이 대기 중으로 흩날리는 먼지를 말하며,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
현장에서 톨스토이식 감염성을 실천하기 위해 제가 스스로 정리한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 규정보다 공감을 먼저: 법적 조항은 설명의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둡니다.
- 상대방의 언어로 말하기: 대기질 수치보다 "가족의 건강"으로 연결합니다.
- 분노를 인식하고 내려놓기: 저도 사고 이후 감정이 흔들리는 중인데, 그 감정이 상대에게 전이되면 점검 자체가 흐트러집니다.
-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기: 오늘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그게 내일 주변으로 번집니다.
이것이 화려한 예술 작품은 아닙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말한 도덕적 감염성의 실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예술의 힘이라는 것은 미술관 안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저도 요즘 사고 후유증으로 마음이 뒤숭숭하지만, 지금 이미 벌어진 일이니 분노보다 해결책을 찾아가는 쪽으로 에너지를 쓰는 게 낫겠다 싶습니다. 전쟁 중에도 피아노를 치는 사람들이 있고, 삭막한 산업단지에서도 친절한 말 한마디로 공기를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고 문학과 예술이 사람을 다시 잇는 역할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그 시작은 오늘 제가 만나는 한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감염'시키느냐에서부터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