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뉴스에서 폭격 장면을 볼 때마다 화면을 끄고 싶었습니다. 미국과 이란의 충돌 소식, 파괴된 건물과 에너지 시설의 폭파 장면은 제게 그저 멀리 있는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죠. 하지만 초등학교까지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 이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전쟁에 정의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마이클 왈처(Michael Walzer)의 정의전쟁론(Just War Theory)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정의전쟁론이란 전쟁이라는 극단적 폭력 속에서도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자는 윤리 이론입니다. 오늘은 현재 진행 중인 미-이란 갈등과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를 통해, 전쟁의 정당성과 우리가 놓치고 있는 윤리적 문제들을 함께 짚어보려 합니다.

정당한 명분과 최후의 수단이라는 기준
제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의외로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따고 재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면접에서 떨어질 때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적합한가'에 대한 명분을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클릭 한 번인 불합격 통보가 제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거대한 사건이었죠. 국가 간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하는 측은 반드시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왈처의 정의전쟁론에서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개전정당성(Jus ad bellum)입니다. 쉽게 말해 '전쟁을 시작할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왈처는 오직 침략에 대한 방어만이 전쟁의 정당한 명분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단순한 보복이나 경제적 이익, 정치적 계산은 결코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최근 미국과 이란의 갈등 상황을 보면 이 기준이 얼마나 모호한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자국군 보호를 위한 선제적 방어를 주장하고, 이란은 주권 침해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고 맞섭니다. 유엔 헌장(UN Charter) 제51조에 따르면 자위권은 인정되지만, 그 범위와 해석은 여전히 논쟁적입니다(출처: 유엔). 누가 먼저 때렸는지, 무엇이 도발인지에 대한 판단 자체가 정치적으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최후의 수단(Last Resort)' 원칙입니다. 왈처는 무력을 사용하기 전에 외교, 협상, 경제 제재 등 모든 평화적 수단을 다 써봤는지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제가 재취업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번의 면접 실패로 포기하지 않고, 이력서를 수정하고, 모의 면접을 거듭하며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한 뒤에야 다른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국제 분쟁들은 과연 그런 과정을 충분히 거쳤을까요?
국제사회에서는 중재와 협상의 노력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압박과 군사적 시위가 먼저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됩니다. 명분이란 것이 실제로는 힘 있는 자의 해석일 뿐, 고통받는 민간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민간인 보호와 비례성의 윤리적 딜레마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를 처음 봤을 때, 저는 화면을 멈추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습니다. 드론 조종사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버튼 하나로 사람의 생명을 결정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특히 빵을 파는 어린 소녀 에일리아가 타겟 근처에 있을 때, 군 지휘부와 정치인들이 벌이는 논쟁은 현대 전쟁의 윤리적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왈처가 강조한 교전법규(Jus in bello)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군인은 전쟁의 합법적 대상이지만, 민간인은 절대 의도적으로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비례성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비례성(Proportionality)이란 군사적 목표 달성으로 얻는 이익이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보다 명백히 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원칙은 끊임없이 위배됩니다. 제가 뉴스로 본 미-이란 갈등에서 드론 공격으로 에너지 시설이 파괴되는 장면, 그리고 그 근처의 민간 거주지가 함께 피해를 입는 모습은 비례성 원칙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민간인 사상자 비율은 전체 전쟁 사상자의 90%에 육박합니다(출처: SIPRI). 이는 전쟁이 더 이상 군인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민간인을 향한 무차별적 폭력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 뉴스를 볼 때마다 느끼는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 한 명의 목숨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테러리스트를 제거하는 임무를 완수할 것인가. 영화 속 장면은 이제 단순한 영화적 설정이 아닙니다. 현대 전쟁에서 드론과 정밀 유도 무기가 일상화되면서, 이런 윤리적 선택은 매일같이 반복됩니다.
문제는 드론 조종사가 모니터 너머에서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들이 느끼는 심리적 거리감입니다. 저도 재취업 준비 중 온라인으로 불합격 통보를 받을 때, 인사담당자는 제 얼굴도 모른 채 클릭 한 번으로 제 인생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전쟁은 더욱 비인간적이 되고, 살상의 책임은 희석됩니다. 왈처가 경고했던 '도덕적 방어선'은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전쟁의 정당성을 따질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숫자로 표시되는 사상자, 화면 속 폭발 장면 뒤에는 실제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쟁의 명분이란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제가 느끼는 가장 큰 안타까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세계화된 경제 속에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타인의 고통에는 너무나 쉽게 무감각해진다는 점입니다.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입니다. 왈처의 정의전쟁론은 전쟁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극악무도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말자는 최소한의 윤리적 기준을 제시할 뿐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기준조차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는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번지지 않기를, 그리고 영화 속 에일리아 같은 아이들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전쟁은 결코 해결책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도 갈등과 경쟁은 존재하지만, 그 속에서 최소한의 인간성과 존중을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정의의 시작이 아닐까요. 오늘 내가 내린 선택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지, 한 번쯤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