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있었습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 교육 이틀이 끝난 다음 날이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상하게 텅 빈 느낌이 들었습니다. 블로그 조회수는 0이었고, 캘린더에는 그 하루만 유일하게 공백이었습니다. 억지로 귀농인의 집 방문을 일정에 집어넣고 길을 나섰는데, 마을에 들어서고 나니 2년 전 체험마을 운영자님과 사무장님께 추석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트에서 작은 선물을 샀고, 얼떨결에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배추밭에 물을 주고 늙은 호박을 정리하다 보니 가로등이 켜져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하루가 어느새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저는 《네브래스카》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길을 나선 노인의 이야기가,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았던 제 하루와 겹쳐 보였습니다.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일부 언급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가짜 목적지가 진짜 여행을 만든다는 것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2013년 영화 《네브래스카》에는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우디 그랜트라는 노인이 한적한 도로를 혼자 걷고 있습니다. 누가 붙잡아도 계속 걷습니다. 목적지는 700마일 떨어진 네브래스카주 링컨입니다. 잡지사에서 보내온 100만 달러 당첨 증서를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솔직히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측은함과 안타까움이 먼저 들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그 우편물이 잡지 판매용 사기라는 걸 알고 있는데, 노인 혼자 그걸 믿고 걷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질문이 달라졌습니다. "왜 저렇게까지 가려는 걸까"에서 "저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뭘까"로.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가 쓴 개념을 빌려올 수 있습니다. 보부아르는 말년에 《노년(The Coming of Age)》을 통해 '타자화(Othering)'를 이야기했습니다. 타자화란, 어떤 존재를 주체로 보지 않고 '이미 끝난 것',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해버리는 사회적 시선을 말합니다. 보부아르는 나이 든 사람이 사회에서 그런 시선을 반복해서 받다 보면 스스로도 그 규정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고 분석했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imone de Beauvoir).
우디도 그런 시선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는 그를 무능하다고 타박하고, 큰아들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가 왜 이 길을 떠나야 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보부아르가 강조한 또 다른 개념이 '프로젝트(Project)'입니다. 프로젝트란 거창한 사업계획이 아닙니다. 내일을 향해 몸을 움직이는 것, 어딘가로 가려는 의지,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방향성, 이 모든 것이 프로젝트입니다. 보부아르는 나이가 들어도 인간에게는 이 프로젝트가 필요하며, 사회가 이를 차단할 때 사람은 '비주체적 존재'로 쪼그라든다고 보았습니다.
그 관점에서 우디의 네브래스카행은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목표가 현실적인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건, 그가 아직 '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100만 달러는 거짓말이었을지 몰라도, 그 거짓말 덕분에 그는 길을 떠났습니다.
제가 그날 억지로라도 마을로 향하지 않았다면, 운영자님과의 점심도 없었을 것이고, 배추밭의 물도 그냥 말랐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하루처럼 보였던 날이, 움직임 하나로 전혀 다른 하루가 됐습니다. 우디의 여행도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동행한다는 것이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작은아들 데이비드는 아버지의 믿음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100만 달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차 키를 집어듭니다. 이 선택이 처음엔 단순해 보이지만, 곱씹을수록 묵직합니다.
공자의 철학에서 효(孝)는 흔히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오해받습니다. 그런데 《논어》를 자세히 읽어보면, 효는 복종보다 훨씬 입체적인 덕목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효란, 부모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 삶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nfucius). 부모의 잘못된 선택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효가 아니라, 부모라는 사람 자체를 이해하고 돌보는 것이 효라는 뜻입니다.
데이비드의 행동이 딱 그렇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선택이 옳다고 인정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교정하려고 여행에 나선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아버지가 그 여행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겁니다.
여기서 공자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인 인(仁)이 연결됩니다. 인이란 '어질다'는 말로 번역되지만, 그 본질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헤아리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상대방의 무게중심을 느끼는 감각입니다.
데이비드에게 100만 달러는 가짜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 여행이 실제라는 사실은 진짜입니다. 이 둘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사실(Fact)과 의미(Meaning)는 다른 층위에 있으니까요.
여행 중 두 사람은 아버지가 살았던 고향 마을 호손을 지납니다. 영화는 흑백으로 촬영되어 있어 그 마을의 쓸쓸함이 더욱 진하게 전해집니다. 그곳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조각조각 듣게 됩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들과 살았는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무엇을 꿈꿨는지.
이 여정을 통해 데이비드가 발견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아버지가 늘 무뚝뚝했던 이유가 단순히 무정한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
- 지나온 삶이 꼭 성공이나 실패로만 나눌 수 없다는 것
-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
저는 이 부분에서 제 부모님을 생각했습니다. 부모의 어떤 선택이 이해가 안 될 때, 저는 그 선택을 고치려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데이비드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먼저 필요한 건 "왜 당신에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질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00만 달러는 결국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디는 경품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여행은 남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삶을 이전과 다른 눈으로 보게 됐고,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고향 거리를 걸었습니다. 보부아르의 말대로라면, 우디에게는 끝까지 프로젝트가 있었던 셈입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꿈의 크기를 다른 사람이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요. 젊을 때는 사업을 시작해도, 새 직업을 가져도 자연스럽다고 하면서, 노년에는 작은 트럭 한 대를 원하는 것조차 '허황된 꿈'으로 부르는 게 맞는 일일까요. 저는 아직 그 답을 모릅니다. 다만 《네브래스카》를 보고 나서 한 가지는 더 확실해졌습니다. 목적지가 틀렸더라도, 움직임 자체가 삶을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 움직임에 누군가가 함께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다음 장면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지금, 아직 가보고 싶은 곳이 하나라도 남아 있습니까.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첫째,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앞으로 할 일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사회가 정해놓은 ‘적절한 나이’와 내가 실제로 원하는 삶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내가 지금 좇고 있는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이나 직업 같은 결과 외에도 새로운 경험, 사람과의 관계, 자기 이해, 추억처럼 과정에서 남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부모나 가족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아직 모르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상대방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왜 그것을 원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는 것이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 Alexander Payne, 《Nebraska》(2013). 아버지 우디와 아들 데이비드가 100만 달러 경품을 받기 위해 몬태나에서 네브래스카로 이동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Paramount Pictures와 BFI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BFI, 《Nebraska》 해설. 영화의 로드무비 구조와 아들이 아버지의 삶을 이해해 가는 과정을 분석합니다.
- Simone de Beauvoir, 《The Coming of Age》. 노년의 타자화, 프로젝트와 의미 있는 관계에 대한 논의를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서 참고했습니다.
- Confucius 관련 철학 자료. 《논어》에서 효와 인, 가족관계와 덕의 형성에 관한 논의를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서 참고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84%A4%EB%B8%8C%EB%9E%98%EC%8A%A4%EC%B9%B4(%EC%98%81%ED%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