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텅 빈 사무실 같은 집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 잭 니콜슨이 연기한 워렌 슈미트는 마지막 퇴근을 마치고 돌아온 첫날 밤,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30년 넘게 일한 보험회사는 아무 문제 없이 그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고, 후임자는 정중하게 그를 돌려보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그 표정을 지은 적이 있다고.
오랜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동창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눈에 띄지 않던 친구인데, 지금은 서울의 유명 대학 교수가 되어 NASA까지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 마음은 축하보다 먼저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저는 그날 실업 상태였거든요.
직업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걸까
워렌 슈미트의 가장 큰 고통은 실직이 아닙니다. 그는 정년퇴직을 했고, 연금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공허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만, 그 공허함의 정체는 영화 중반쯤에야 조금씩 드러납니다. 후임자에게 거절당하는 장면, 모교 후배들이 그의 이야기에 시큰둥한 장면, 이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워렌은 조용히 무너집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라고 부릅니다. 정체성 위기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해주던 역할이나 관계가 사라졌을 때 찾아오는 혼란을 의미합니다.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발달 심리학에서 처음 정식화한 개념이지만, 이것은 청소년기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직장을 잃은 50대에게도,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마친 60대에게도 찾아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30여 년의 직장생활을 마친 뒤 공공일자리도 해보고, 기간제 업무도 했습니다. 미세먼지 감시원으로 일하던 날이 있었고, 통계조사 업무를 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일하는 동안은 괜찮았습니다. 계약이 끝나는 순간, 다시 그 질문이 돌아왔습니다.
"요즘 무슨 일 하세요?"
그 질문이 왜 그렇게 부담스러웠는지, 지금은 조금 압니다. 저는 직업을 잃은 게 아니라 저를 설명해주던 말을 잃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NASA와 나의 실업 상태
동창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며 저는 이상한 비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가장 빛나는 결과와 제 삶의 가장 불안한 순간 인 지금 재취업의 어려움을 겪으며 아직도 자식 문제로 하루 하루 괴로움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를 나란히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굉장히 불공평한 셈법입니다. 그 동창이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겪었는지, 무엇을 포기했는지, 저는 전혀 모릅니다. 그 사람 인생의 가장 빛나는 한 장면만 들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스토아 철학(Stoicism)의 핵심 개념이 등장합니다. 스토아 철학이란 기원전 3세기 그리스에서 시작된 철학으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태도를 핵심으로 삼습니다. 노예 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것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어떤 것들은 달려 있지 않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은 의견, 충동, 욕구, 혐오다. 달려 있지 않은 것은 신체, 명성, 재산, 관직이다."
(출처: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명성이나 직업이 달려 있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에픽테토스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어떤 자리에 오르는지는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그것에 내 하루 전체를 저당 잡힐 필요도 없다는 것.
그날 제가 통제할 수 없었던 것들이 있습니다.
- 동창이 NASA에 다녀왔다는 사실
- 친구 부부가 재취업에 성공했다는 사실
- 제 나이가 이미 6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는 사실
- 재취업 시장이 중장년에게 좁다는 현실
그리고 그날 제가 그래도 선택할 수 있었던 것들도 있습니다.
- 그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한 번 들여다보는 것
- 내일 다시 일자리 정보를 찾아보는 것
- 텃밭에 나가 흙을 만지는 것
-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는 것
전자는 손 쓸 수 없었습니다. 후자는 아직 제 손 안에 있었습니다.

워렌이 울었던 이유, 그리고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
영화 마지막 장면. 워렌은 집에 돌아와 편지를 열어봅니다. 탄자니아의 여섯 살 아이 은두구가 수녀의 도움을 받아 보낸 것입니다. 편지 안에는 그림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른 손과 아이 손이 맞잡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워렌은 소리 없이 울기 시작합니다.
그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은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워렌은 딸의 결혼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여행에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고, 아내의 외도까지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 하나에서 무너집니다. 아마도 그것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진짜로 연결되어 있다는, 어쩌면 처음 느껴본 증거였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실존주의(Existentialism)적으로 읽으면 이 장면은 더 선명해집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이 본래 주어진 의미 없이 태어나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워렌이 마침내 울 수 있었던 것은 직업이나 역할이 아니라, 그 아이와의 연결에서 스스로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으로 읽힙니다.
영화 연구자들도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연출에서 이 지점을 주목합니다. 페인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고, 잭 니콜슨은 이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저 마지막 장면 하나에 있다는 것이 많은 평자들의 공통된 시선이기도 합니다.
(출처: IMDb, About Schmidt (2002))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동창은 NASA에 갔다 왔다고 하고, 저는 실업 상태입니다. 자녀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두 삶은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는 의미 있고 하나는 의미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아직 귀촌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재취업이 될지도 모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시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불확실하다는 것이 곧 실패는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은 마침표가 아니라, 조금 늦게 찾아온 새 문장을 시작하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어바웃 슈미트》는 묻습니다. 역할이 사라진 뒤에도 당신은 여전히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저는 그 질문을 아직 들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생활 속에서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적용해본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이 들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 지금 내가 비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의 인생 전체인가요?
아니면 상대의 가장 화려한 결과 하나인가요?
- 이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인가
다른 사람의 성공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사실 때문에 오늘 하루 전체를 무너뜨릴 필요는 없습니다.
-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
작은 행동 하나라도 괜찮습니다.
재취업 정보를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돌볼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시 쉬어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다음 한 걸음을 선택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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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 질문
- 나는 다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가장 빛나는 결과만 보고 있는가?
- 지금의 실업 상태가 정말 내 인생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삶과 영화, 철학에 대해 생각해본 내용입니다. 재취업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이 일상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면 전문적인 상담이나 관련 기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96%B4%EB%B0%94%EC%9B%83%20%EC%8A%88%EB%AF%B8%ED%8A%B8
https://www.imdb.com/title/tt0257360/
https://www.yes24.com/product/goods/98534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