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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산다는 것은 무엇을 선택하는 일일까요? — 영화 《시골영웅》(영어 로컬 히어로)와 하이데거의 거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체 철학

by cinema-1 2026. 10. 14.

이사를 앞두고 짐을 싸본 적이 있으십니까. 박스에 책을 넣다가, 아무 이유 없이 손이 멈추는 순간이 있습니다.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이 놓여 있던 시간이 자꾸 눈에 밟혀서입니다. 저는 그 멈춤이 뭔지 오래 몰랐습니다. 1983년에 만들어진 빌 포사이스 감독의 영화 《로컬 히어로》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질문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장소를 떠난다는 것과 장소에서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장소를 소유하는 것과 거주하는 것은 다릅니다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결말 이야기는 아니고, 주인공 맥킨타이어가 페르네스 마을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시선에 대해서입니다.

그는 석유회사 직원으로, 스코틀랜드의 이 작은 해안 마을을 매입하러 왔습니다. 그에게 마을은 계약서 위의 좌표였습니다. 땅값과 면적, 협상 조건이 있는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의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해가 지는 방향, 술집에서 나누는 농담, 해변에서 별을 세는 노인. 이것들은 계약서에 적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을을 마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계약서에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하이데거의 '거주(Dwelling)'라는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거주란 단순히 한 장소에 주소를 두는 일이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Building Dwelling Thinking)」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주한다는 것은 세계와 관계 맺으며 그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하면,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관계를 쌓으며 살아가는 일, 그것이 진짜 거주입니다(출처: 하이데거, 「Building Dwelling Thinking」, 1951).

집을 사는 것과 그 집에서 사는 것이 다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맥킨타이어는 마을을 살 권한을 가지고 왔지만, 마을에서 사는 법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알아챈 순간, 그는 혼란에 빠집니다. 저도 솔직히 처음엔 이 영화가 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냥 일이 잘 풀리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란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었습니다.

좋은 삶은 혼자 완성되지 않습니다

귀농이나 귀촌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40대 이상이라면 막연하게라도, 20대라면 지쳐서 한 번쯤은 떠올렸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준비를 시작하면 벽에 부딪힙니다. 집값, 농지 가격, 일자리, 의료 접근성. 마음은 벌써 들판에 가 있는데, 몸은 스프레드시트 앞에 앉아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간극을 꿰뚫어 봤습니다. 그는 《정치학(Politics)》에서 인간을 '폴리티콘 조온(politikon zōon)', 즉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정의했습니다. 여기서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이웃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의 능력을 나누고, 관계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며, 그 과정에서 좋은 삶(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을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출처: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에우다이모니아란 단순한 행복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펼치며 살아가는 번성하는 삶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삶은 혼자가 아닌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습니다.

영화 속 페르네스 마을이 그렇습니다. 술집 주인은 회계사이기도 하고, 어부는 협상 테이블에도 앉습니다. 마을은 역할이 겹치고 사람이 겹칩니다. 외부인 맥킨타이어의 눈에는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그 겹침이 공동체를 단단하게 묶는 실이었습니다.

귀촌을 준비하는 분들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어려움도 비슷한 구조입니다. 혼자 가면 정보도 없고, 관계도 없고, 실패했을 때 기댈 곳도 없습니다. 반면 지역 공동체 안에 연결될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농촌 정착 초기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들을 꼽아보면 이렇습니다.

  • 농사 경험을 나눠주는 이웃
  • 지역 일자리나 판로를 연결해 주는 관계망
  • 낯선 행정 절차를 알려주는 선주민
  • 생활 리듬을 함께 맞춰갈 수 있는 소규모 모임

제가 아는 한 분은 귀촌 첫 해, 이웃 어른이 건넨 모종 몇 개로 텃밭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 모종이 반찬거리가 됐고, 그 반찬을 나누면서 마을에 얼굴을 알렸고, 그 얼굴이 쌓여 관계가 됐다고요. 제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공동체가 이것이구나 싶었습니다.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모종 한 줌으로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로컬 히어로>와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 이미지

 

 

경제적 가치와 삶의 가치가 부딪힐 때

영화의 갈등 핵심은 땅입니다. 석유회사가 원하는 것은 토지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가진 것도 토지입니다. 그런데 두 집단이 그 땅에 매기는 가치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것은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이 충돌은 반복됩니다. 도시 사람에게 농지는 투자 자산일 수 있고, 평생 농사를 지어온 분에게 같은 땅은 일생이 묻혀 있는 장소입니다. 가격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과, 가격으로 환산해서는 안 되는 것이 같은 좌표에 겹쳐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장소에는 토폴로지(topology), 즉 존재와 장소의 관계가 쌓입니다. 토폴로지란 어떤 공간이 단순한 위치 좌표를 넘어, 거기서 살아온 사람의 존재 방식과 엮이는 성질을 뜻합니다. 시세표에 적힌 숫자가 그것까지 담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맥킨타이어가 전화 부스 근처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입니다. 업무 통화를 하러 나갔다가, 그냥 하늘을 보고 서 있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거래 밖에 있는 뭔가를 발견하는 순간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농촌 정착을 고민하는 분들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옵니다. 수지 계산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거기서 어떤 하루를 살고 싶은가를 물어보게 되는 순간. 그것이 낭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낭만이 없으면 현실을 버텨낼 동력도 없습니다. 낭만과 현실은 반대가 아닙니다. 낭만이 먼저 오고, 현실은 그다음에 꼼꼼히 따져야 할 조건입니다.

결국 《로컬 히어로》가 제게 남긴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떤 장소입니까, 아니면 그 장소에서 살아가는 어떤 방식입니까. 두 가지가 같아 보여도, 출발점이 다르면 선택도 달라집니다. 저는 아직 이 질문에 완전한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말을 걸어오는 것이겠지요.

 

함께 생각해 볼 질문

  1. 농촌에 정착한다는 것은 집과 땅을 마련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그곳에서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을 만드는 일일까요?
  2. 같은 지역에서 살아도 사람마다 정착의 모습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자연과 공동체를 향한 마음과 경제적 현실이 충돌할 때, 어떤 기준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할까요?

 

참고 자료

  • 영화 《로컬 히어로》(Local Hero, 1983), 감독 빌 포사이스(Bill Forsyth).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Building Dwelling Thinking)」, 1951.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정치학(Politics)》.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rtin Heidegger.”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istotle’s Political Theory.”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A%B3%A8_%EC%98%81%EC%9B%85
https://prelectur.stanford.edu/lecturers/heidegger/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istotle-poli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