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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를 위해 농사를 짓는가 《라이더》(The Rider)와 에피쿠로스가 묻는 노동과 행복의 의미

by cinema-1 2026. 9. 13.

저는 그 장면에서 손을 멈췄습니다. 브래디가 다 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말 위에 오르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말을 탈 수 없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그 눈빛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없어지면, 나는 누구인가?"

클로이 자오 감독의 《라이더》(The Rider, 2017)는 화려한 사고 실험이 아닙니다. 실존했던 카우보이의 이야기를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영화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질문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일을 잃은 사람은 무엇을 잃는가

브래디는 로데오 카우보이입니다. 낙마 사고로 두개골에 금속판이 박힌 뒤 의사는 다시 타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짜로 묻는 것은 신체적 위험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은 이제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철학에서 말하는 정체성의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정체성(Identity)이란, 내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일관된 자아의 감각을 뜻합니다. 우리는 대개 이것을 직업에서 찾습니다. 퇴직 후 극심한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 사업이 무너진 뒤 삶 전체가 흔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이 사라지면 정체성의 뿌리 하나가 함께 뽑힙니다.

솔직히 처음엔 브래디의 고집이 무모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몸이 이미 지쳐 있는데도 저녁을 거른 채 장갑을 끼고 밭으로 나갔던 날이 있었습니다. 바자회에서 하루 종일 움직인 몸으로 가로등 불빛 아래 고구마 줄기를 걷어냈습니다. 멈추지 못하는 이유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밭이 없어지면 제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설명이 안 된다는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브래디도 저도, 일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라이더>와 에피쿠로스의 철학사상

 

많이 생산한다고 행복해지는가 — 에피쿠로스가 던진 질문

 

수확은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흙 속에서 고구마가 모습을 드러낼 때, 늙은 호박이 노랗게 익어 있을 때, 그 뿌듯함은 분명 실재했습니다. 그런데 수확을 마치고 나니 곧바로 다른 걱정이 찾아왔습니다. "이 많은 것을 어떻게 하지?"

 

 

제때 수확하지 못해 늙은 호박 사진

 

 

그때 떠오른 철학자가 에피쿠로스(Epicurus)였습니다. 에피쿠로스란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로, 행복의 본질을 쾌락에서 찾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쾌락은 흔히 오해하는 방종이나 과잉과 거리가 멉니다. 에피쿠로스가 실제로 강조한 것은 아타락시아(Ataraxia)였습니다. 아타락시아란 마음의 동요가 없는 평온한 상태, 불안도 결핍도 없는 고요함을 뜻합니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분별해 덜어냄으로써 도달하는 평화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 자연스럽고 필요한 욕망 (음식, 잠, 우정처럼 삶에 꼭 필요한 것)
  • 자연스럽지만 필요하지 않은 욕망 (더 맛있는 음식, 더 넓은 집처럼 없어도 되는 것)
  •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명예, 끝없는 부처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

밭에서 이 분류를 대입해봤을 때, 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욕망을 꽤 많이 심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남는 땅이 있으니까", "이것도 키워볼까"라는 생각으로 심은 작물들이 결국 전부 저의 노동과 걱정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많이 생산할수록 더 행복할 것이라는 가정은 실제로 거의 맞지 않았습니다. 수확량이 늘어난 만큼 처리해야 할 일도 늘어났고, 나눠주려 했더니 손질해서 보내달라는 구체적인 부탁이 돌아왔습니다. 처음엔 기꺼이 시작한 나눔이 어느 순간 의무처럼 느껴졌습니다. 선물이 역할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고구마와 각종 작물 사진

 

베푼다는 것과 소진된다는 것 사이

제가 동생에게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농사지은 사람에게는 누군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 그 자체로 보람입니다. 그 안에는 더위와 허리 통증과 잡초와 벌레와 싸운 시간이 들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동생이 "늙은 호박을 손질해서 보내줄 수 있어?"라고 물었을 때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잘못된 부탁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먼저 문을 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 일이 하나 더 생긴 느낌이었습니다. 자발적이었던 베풂이 갑자기 수행해야 할 업무처럼 바뀌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로 설명했습니다. 에우다이모니아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번성하는 상태, 즉 삶 전체가 잘 피어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좋은 삶은 자신을 완전히 소모하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관계를 맺고 역할을 다할 때 지속됩니다.

저는 그날 결국 호박을 손질해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틀린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엔 조금 다르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호박은 줄게. 손질까지는 지금 몸이 어려워." 이 한 문장이 관계를 냉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오래 나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그날 처음 이해했습니다.

브래디도 결국 그 선택 앞에 섭니다. 말을 다시 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그 답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질문만 남깁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저는 그 질문이 브래디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30대에게도, 퇴직 후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려는 60대에게도, 가로등 아래에서 밭을 정리하던 저에게도 똑같이 해당합니다. 내가 하는 일의 이유를 기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이유가 지금의 소진을 설명해주는지.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계신지, 오늘 하루 한 번쯤 여쭤보고 싶습니다.

 

생활 속에서 생각해볼 세 가지

첫째,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가운데 ‘정말 필요한 일’과 ‘습관적으로 떠안은 일’을 구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일을 계속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둘째, 누군가에게 베풀 때 나의 한계를 미리 정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다”는 기준이 있으면 나눔이 부담으로 변하는 것을 줄일 수 있습니다.

셋째, 수확량보다 과정에서 얻는 만족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이 얻는 것이 반드시 많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충분히 쉴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생각해볼 질문 3가지

  1.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왜 하고 있을까요?
  2. 내가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은 어디까지가 기쁨이고, 어디서부터 부담이 될까요?
  3.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생산하는 삶과, 필요한 만큼 가지고 평온하게 사는 삶 중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참고: https://m.blog.naver.com/camoju/221323737996
https://plato.stanford.edu/entries/epicurus/
https://www.britannica.com/topic/eudaimo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