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한 장면에서 손을 멈췄습니다. 이근혁 씨가 농민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와 조용히 다투는 장면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 불편함이 오래 남았습니다. 귀농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아니 새로운 삶을 시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장면에서 무언가를 느낄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농촌은 풍경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농촌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왜 다시 그 땅으로 들어가는가. 낭만이라고 보기에도 어렵고, 단순한 도피라고 보기에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이근혁 씨가 연고도 없는 충남 부여 삽티마을에 발을 들인 건 1998년이었습니다. 농사와 농민운동,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겠다는 꿈을 안고서요. 그런데 《농가일기》가 보여주는 건 그 꿈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꿈이 현실과 부딪히는 매일의 마찰입니다.
귀농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놓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의 풍경을 좋아하는 것과 농촌에서 매일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주말에 드라이브하며 바라보는 논밭과, 새벽에 일어나 관리해야 하는 밭은 같은 공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몸으로 배우기 전까지 우리는 대부분 풍경을 선택하는 줄 알고 삶을 선택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귀농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밭에 나가는 것 자체를 꺼렸습니다. 벌레가 싫었고, 흙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반복해서 밭에 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풀을 보면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이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달라진 건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습관'이라는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탁월성(Arete)에서 찾았습니다. 탁월성이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반복된 행동을 통해 쌓인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기 있는 행동을 반복해야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 덕은 행함으로써 얻어진다"(출처: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한 번의 결심이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매일의 작은 행동이 쌓여 그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관점에서 《농가일기》를 다시 보면 이근혁 씨의 삶이 다르게 읽힙니다. 그는 귀농이라는 결심을 한 번 한 사람이 아닙니다. 매일 새벽 밭에 나가고, 회의에 참석하고, 아내와 갈등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견디면서 그 삶을 반복해서 살아낸 사람입니다. 귀농은 이사 날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하루하루로 완성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 사실을 벌초를 하면서 실감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남편이 풀을 베는 동안 멀찍이 서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곁에서 도왔습니다. 벌레에 물려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의무감이 아니라 그냥 해야 할 일이라고 몸이 먼저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반복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제 성품의 일부가 된 순간이었습니다.

하이데거의 '거주'와 진짜 정착의 의미
주소를 옮기는 것과 그곳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다릅니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 차이를 거주(Wohne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거주란 단순히 어떤 공간 안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 장소와 관계를 맺고, 그 장소 안에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행위 자체를 뜻합니다(출처: 마르틴 하이데거, 「짓기, 거주하기, 생각하기」, 1951년 강연).
귀농인의 집에 살면서 저는 이 차이를 몸으로 배웠습니다. 처음 그 집은 농촌을 체험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고, 작물을 키우고, 이웃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 공간이 달라졌습니다. 정확히는 제가 달라졌습니다. 그곳이 단순한 체류지에서 생활의 터전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게 하이데거가 말한 거주의 시작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농가일기》의 이근혁 씨도 삽티마을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연고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밭을 일구고, 마을 사람들과 부딪히고, 그 땅에서 아버지를 잃고 딸을 키우면서 그는 그곳의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거주는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으로 쌓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의 삶이 보여줍니다.
귀농은 개인의 결정이 아니라 관계의 재조정이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오래 생각한 건 이근혁 씨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내였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만, 그 부부의 갈등은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기보다 서로 다른 속도로 적응하고 있는 두 사람의 마찰이었습니다.
귀농은 한 사람이 결심한다고 완성되지 않습니다. 가족 전체의 삶을 다시 조정하는 과정입니다. 제가 먼저 귀농 교육을 받고, 먼저 농촌에 적응하는 동안 남편은 다른 속도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간격이 좁혀지기 시작한 건 남편이 스스로 귀농기본교육을 받아보겠다고 했을 때였습니다. 설득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변화였습니다.
귀농을 준비하면서 반드시 함께 점검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 주거: 어디서 살 것인가, 그 지역을 두 사람 모두 실제로 살아보았는가
- 소득: 안정적인 수입원은 무엇인가, 농사만으로 생계가 가능한 구조인가
- 노동: 서로의 노동량과 역할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적 있는가
- 관계: 지역사회에 적응하는 데 두 사람 모두 준비가 되어 있는가
- 시간: 몇 년의 계획인가, 중간에 돌아오는 것도 선택지로 열어두었는가
이 목록을 혼자 체크하는 것과 함께 체크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귀농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좋은 땅이나 충분한 자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이 곁에 있는가, 그것이 먼저일지 모릅니다.
《농가일기》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귀농을 권하지도, 말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구체적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줄 뿐입니다. 그 솔직함이 오히려 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농촌이 좋은 것입니까, 아니면 농촌에서 살아가는 삶이 좋은 것입니까. 이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볼 질문 3가지
- 나는 지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무엇을 조금씩 바꾸고 있을까요?
- 내가 좋아하는 ‘장소’와 내가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은 같은 것일까요?
-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혼자 결정하는 것과 가족이 함께 결정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참고: https://siff.kr/films/%eb%86%8d%ea%b0%80%ec%9d%bc%ea%b8%b0/
https://www.yes24.com/product/goods/4298959
https://plato.stanford.edu/entries/heide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