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카톡 상태메시지를 보다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적이 있습니다. "살기 싫다"는 말이 거기 있었습니다. 직장 얘기였을 수도 있고, 그냥 힘들다는 푸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든 간에, 부모 마음은 이미 달리고 있었습니다. 영화 《더 썬》을 보면서 그 기억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이 영화는 아버지 피터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사랑한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피터는 나쁜 아버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했던 것을 아들에게 주고 싶어 합니다. 아들 니컬러스가 학교를 나가지 못할 만큼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 집으로 데려옵니다. 함께 지내고, 밥을 먹고, 곁에 있어 주려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게 충분한가, 하고요.
피터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학교에 나가 보자. 친구를 만나 보자. 조금씩 나아질 거야.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규칙적인 생활, 사회적 관계, 이런 것들이 도움이 된다는 건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니컬러스는 나아지지 않습니다. 피터의 해결책이 잘못된 게 아니라, 니컬러스가 겪고 있는 고통의 깊이를 피터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겁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멈칫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자녀의 내면을 이해한다는 사실은 같은 말이 아닌데 우리는 그걸 자주 혼동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개념이 연결됩니다. 측은지심이란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았을 때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맹자는 《공손추 상편》에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본능적으로 달려가게 된다고 했습니다(출처: 맹자, 『孟子』 公孫丑 上篇). 그 반응 자체가 인간에게 도덕적 씨앗이 있다는 증거라고 본 것입니다.
피터의 마음은 분명 측은지심에서 출발합니다. 아들이 힘들다는 걸 알고 달려갑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측은지심은 도덕의 시작점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맹자는 이 씨앗을 성찰과 실천으로 길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달려가는 마음 다음에, 상대방이 실제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살피는 과정이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피터는 달려갔지만, 니컬러스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는 충분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걱정하는 마음이 상처가 될 때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이렇게까지 애쓰는 아버지가 왜 아들에게 닿지 못하는 걸까, 하고요. 보다 보니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피터는 아들의 고통 앞에서 자꾸 해결사가 되려 합니다. 이건 부모의 본능이기도 하고, 어쩌면 자신의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아들이 나아지면 자신도 좋은 아버지가 된 거니까요. 그 구도에서 니컬러스의 고통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고, 니컬러스는 그 문제를 가진 대상이 됩니다.
우울증(Depression)이라는 상태는 그 구도 안에서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울증이란 단순히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가 아니라, 신경생물학적 변화를 동반한 정신건강 상태로 의지나 노력만으로 쉽게 극복되지 않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DSM-5). 피터가 "조금만 더 힘내 보자"고 말할 때, 니컬러스는 그 말이 자신의 고통을 의지 부족으로 읽는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족관계에서 이런 간극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걱정하는 마음이 오히려 상대방을 더 외롭게 만드는 아이러니. 저도 그 아이러니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아들에게 달려가 저녁을 먹고 집 정리를 도와주고 내일 해야 할 일을 설명하고 돌아오는 길에, 제가 아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들었는지 떠올려봤습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봤습니다.
- 자녀의 말을 들을 때, 해결책을 먼저 떠올리기보다 "지금 얼마나 힘든지"를 먼저 묻는 것.
- 부모의 경험으로 자녀의 상황을 재단하지 않는 것. 세대가 다르면 감당하는 고통의 모양도 다릅니다.
-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 자녀에게 전문적인 도움을 권하는 일이 부모의 사랑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인(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맹자가 측은지심을 인의 출발점으로 본 개념으로, 인이란 타인을 배려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도덕적 덕목을 의미합니다. 피터에게 측은지심은 있었습니다. 그가 닿지 못한 건 인의 완성, 즉 니컬러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공감(Empathy)과 동정(Sympathy)의 차이도 여기서 의미가 생깁니다. 동정이란 타인의 고통을 바깥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는 감정이고, 공감이란 그 사람의 감정 안으로 들어가 함께 느끼는 능력을 말합니다. 브레네 브라운은 공감이 연결을 만들고 동정은 단절을 만든다고 말했습니다(출처: Brené Brown, RSA animate, 'Empathy'). 피터의 사랑은 진심이었지만, 그 방식은 가끔 동정에 머물렀습니다.
영화가 마지막에 남기는 감정은 무겁습니다. 그 무게가 오래 남습니다. 피터를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는 것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언제나 같지는 않다는 사실, 그게 이 영화가 건네는 가장 가혹한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을 때, 그 사람의 고통이 우리가 아는 고통과 다른 모양일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아직 그 질문을 들고 삽니다.
생각해 볼 질문 3가지
- 가족이나 주변 사람이 힘들다고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상황을 충분히 듣기 전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결책부터 제시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 누군가의 고통을 걱정하는 마음을 실제적인 도움으로 연결하려면 어떤 행동이 필요할까요?
-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한다고 느낄 때, 주변 사람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참고자료
[영화 자료]
Sony Pictures Classics, The Son 공식 작품 소개
https://www.sonyclassics.com/film/theson
[철학 자료]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encius”
https://plato.stanford.edu/entries/mencius/index.htm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he Emotions in Early Chinese Philosophy”
https://plato.stanford.edu/entries/emotions-chinese/
참고: https://namu.wiki/w/%EB%8D%94%20%EC%8D%AC(%EC%98%81%ED%99%94)